최광필(崔光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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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608년(선조 41) = 5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 정랑(正郞)이고,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이다. 자는 정로(廷老)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주거지는 황해도 장단(長湍)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최영(崔韺)이고, 어머니 사천목씨(泗川睦氏)는 사헌부 감찰목함(睦諴)의 딸이다. 증조부는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최사순(崔士諄)이고, 조부는 최경복(崔福慶)이다.(『방목』 참조.)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합격하고, 그해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방목』 참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부모를 모시고 경기도 가평 조종현(朝宗縣)으로 피난갔다가,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 3년 상복(喪服)을 벗고, 1595년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서 학유(學諭)·학록(學錄)을 거쳐, 의정부(議政府)사록(司錄)으로 옮겼다. 그 뒤에 성균관 박사(博士)를 거쳐 선공감(繕工監)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 또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를 역임하였다. 1602년(선조 35)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그해 12월 사간원에서 탄핵하기를, “예안 현감최광필은 본래 성품이 옹졸하여 부임한 뒤로 정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맡겼는데, 하리들이 간악한 짓을 하여, 온 고을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도 그 관직에 둘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파직하라고 명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조.)

1604년(선조 37) 2월 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1606년(선조 39) 11월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가서,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개진(開陳)하였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궁궐을 축조하려고, 필요한 동량(棟樑)을 강원도에서 조달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도민들을 가혹하게 독촉하여 강원도 사람들이 농사를 전폐하다시피 하고 모두 역사에 동원되었다. 최광필은 궁궐의 축조를 중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당시 정사(政事)의 잘잘못에 대하여 20여 조목을 상소하였는데, 상당히 과격하게 시정(時政)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언관(言官)을 사주하여 그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는 몹시 실망하여 고향 장단으로 돌아가서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계곡집(谿谷集)』 권12 「공조 정랑 최공 묘갈명(工曹正郞崔公墓碣銘)」 참조. 이하 「최광필 묘갈명」이라 약칭함.)

1608년(선조 41) 선조가 승하하자, 최광필은 방상(方喪)의 예를 지켜 산릉(山陵)의 역사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사랑채에서 거처하면서 소식(素食)을 하고 이웃의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몸이 야위어 병이 나려고 하였으므로, 친구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육식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그 권유를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건강을 잃고, 1608년 10월 13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최광필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온화하고 근신하며, 효성과 의리에 독실하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장성하자 학문에 힘써 경전(經典)에 통달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사당(祠堂)을 알현하고 출입할 때 반드시 참배하였다. 선조(先祖)의 제사를 지낼 때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준행하였다. 계모(繼母)를 섬길 때 그 뜻을 잘 받들었는데, 언제나 집이 가난하여 모든 것을 갖추어 받들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한스러워 하였다. 독서를 좋아하고, 자기 분수에 맞게 살고, 시대에 부응하거나 이끗을 추구하는 따위는 자기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기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비판하기를, “사정에 어둡고 졸렬하다.”고 하였다.(「최광필 묘갈명」 참고.) 『선조실록』선조 35년 12월 19일(병오)조 기사에서 사관은 그에 대해 “위인이 혼미하고 용렬하였다. 그러나 효행(孝行)은 있었다.”라고 평하였다. 또 『선조실록』선조 39년 11월 4일(기사)조에 사관은 “위인이 혼미하고 용렬하였다”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을 들었던 까닭에 그는 관운(官運)을 크게 떨치지 못하고 벼슬한 지 20년이 되도록 낭관(郎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강원도도사로 도민들의 고통과 당시 정사의 잘잘못에 대하여 상소하였을 적에, 사관은 『선조실록』선조 40년 4월 4일(병신)조 기사에서 “최광필은 혼암하다는 것으로 한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논한 것이 정확히 시폐(時弊)를 적중시켰다. 아, 민생이 괴로움에 시달려 고통당하는 정상을 이 한 장의 상소를 가지고도 그 나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 때문에 말을 폐하니 애석하다.” 라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어버이를 모시고 경기도 가평 조종현으로 가서 병화를 피하다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그곳에다 임시로 장례를 치렀다. 그 때 적병들이 곳곳마다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구차하게 살았다. 그런데 최광칠은 장지(葬地)를 떠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지켰다. 낮에는 산으로 들어가서 왜구를 피하고, 밤에는 상막(喪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주고 마치 자신의 친척처럼 보호하였다.(「최광필 묘갈명」 참고.) 임진왜란 때 그가 예조의 낭관(郎官)으로서 여러 차례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명나라 장수들을 맞이하여 접대하니, 명나라 장수들이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최광필 묘갈명」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모리(某里)의 선영(先塋)에 있었는데, 26년 뒤에 부인 윤씨(尹氏)가 죽어서 부장(附葬)하려고 무덤을 팠더니, 뫼 구덩이에 물이 있었으므로, 다시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 합장(合葬)하였다. 계곡(谿谷)장유(張維)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계곡집』 권12 「공조 정랑 최공 묘갈명」) 죽은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를 추증(追贈)하였다.

부인 무송윤씨(茂松尹氏)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윤언청(尹彥淸)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최율(崔嵂)은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를 지냈고, 둘째 아들 최업(崔嶪)은 귀후서(歸厚署)별제(別提)를 지냈다.(「최광필 묘갈명」 참고.) 셋째 아들은 진사(進士)최집(崔㠍)이고, 딸은 윤의민(尹義民)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