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영(申思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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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0년(현종 11)∼1736년(영조 12) = 67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승지(承旨)를 지냈다. 자는 자구(子久)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신구(申銶)이고,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조수한(趙壽漢)의 딸이다.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신명규(申命圭)의 손자이고, 예조 판서 신임(申銋)의 조카이다. 몽와(夢窩)김창집(金昌集)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나이 64세에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선 시대 늦게 과거에 합격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숙종 시대 활동

1699년(숙종 2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방목』]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落榜)을 하자, 부모와 자식을 봉양하기 위하여 음직(蔭職)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었다. 전례대로 승진하여 상의원(尙衣院)별제(別提)에 이르렀고,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또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신계 현령(新溪縣令)이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살이를 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학문의 탐구에만 몰두하자, 몽와김창집이 그를 칭찬하였다.

그 뒤에 6~7년이 지나서,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임명되었다. 전주부(全州府)는 전라 감영(全羅監營) 아래 있었으므로 물자도 많고 일도 번거로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이름이 난 곳이었지만, 그가 대응하기를 여유 있게 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주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 은혜를 칭송하였다. 내직(內職)으로 돌아와서 호조 좌랑과 공조 좌랑이 되었으나, 마침 조정에서 남인(南人)들이 정권을 잡고 제멋대로 날뛰었으므로, 기회를 엿보다가 병이 들었다는 글을 올리고 출사(出仕)하지 않고, 바로 고향 고양(高陽)으로 돌아왔다.[『도곡집(陶谷集)』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承政院右副承旨申公墓碣銘)」]

영조 시대 활동

영조가 처음에 즉위하여 선량한 인재를 등용하자, 신사영도 벼슬에 천거되어 주부(主簿) · 정랑(正郞) · 첨정(僉正) 등의 관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정치 판도가 갑자기 변하자, 마침내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고양의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부터 역적의 변란이 서로 잇달아서 국가의 형세가 매우 불안하였다. 그가 참하관(參下官)으로 이리저리 벼슬을 옮겨다니는 것이 그의 뜻에 더욱 맞지 않았다.[『도곡집』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

1733년(영조 9) 태복시(太僕寺) 첨정(僉正)으로 있을 때 알성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64세였다.[『방목』] 당시 노구(老軀)임에도 불구하고 얼굴빛은 불그스레 상기되고 수염도 희게 변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늙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바로 종부시(宗簿寺)정(正)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권력을 잡는 사람들이 한 세대를 넘기도록 권력을 농락하자, 인사들이 서둘러 지조를 바꾸어 벼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서 역적(逆賊)의 옥사에 대한 판결이 점차로 느슨해졌으므로, 그가 분개스러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맨 먼저 공의(公議)에서 가장 배척을 받는 재상 몇 사람을 탄핵하였는데, 사람들이 늙은 대신(臺臣)의 풍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도곡집』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 1733년(영조 9)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정(正)이 되었다. 1734년(영조 10) 다시 장령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승진되었다.[『도곡집』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 『영조실록』 10년 5월 15일 · 7월 20일 · 8월 29일]

당시 세조(世祖)의 영정(影禎)을 다시 베껴서 그렸는데 그가 바로 베껴서 세조의 쉬용(晬容)을 만든 공로로 직질(職秩)을 더하여 가자(加資)하고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다.[『도곡집』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 1735년(영조 11) 승정원(承政院) 승지에 발탁되었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영조실록』영조 11년 10월 16일, 영조 12년 2월 27일] 1736년(영조 12) 5월 30일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67세였다. 그는 본래 강건하여 질병이 없었는데, 우연히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과거에 급제한지 겨우 3년만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도곡집』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

성품과 일화

신사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도곡집』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 그는 성품이 명랑하고 침착하며, 풍채가 빼어나고 우아하며, 재주와 품격이 있었다. 일찍이 사가(私家)에서 차린 글방에서 공부하면서도 이미 어른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었다. 어렸을 때 도깨비불을 만나서 뭇 아이들은 놀라서 도망을 하는데 그 혼자서만 곧장 앞으로 향하여 가니 도깨비불이 저절로 없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그의 기백(氣魄)을 높게 여겼다.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품행을 잘 갖추어져서, 자라서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언행이 모두 아름답고 여유가 있었다. 여러 차례 세상의 변고를 거치면서도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구차스럽지 않았다.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에는 사건을 만나면 반드시 할 말을 다하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나, 성격이 강직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 집안에서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거친 음식과 헤진 옷을 편안히 여기고, 종신(終身)토록 근검절약(勤儉節約)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노원(蘆原)에 있는데,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15 「승정원 우부승지 신공 묘갈명(承政院右副承旨申公墓碣銘)」]

부인은 함풍 이씨(咸豐李氏)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준(申晙)은 현령(縣令)을 지냈고, 차남 신위(申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를 지냈는데, 계부(季父)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장녀는 진사(進士)이방협(李邦協)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士人)심사검(沈師儉)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