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익(趙守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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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5년(명종20)∼1602년(선조35) = 38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시보(時保), 호는 자오(自娛)이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주거지는 서울 과천(果川)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조정기(趙廷機)이며,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관찰사(觀察使)강욱(姜昱)의 딸이다. 홍문관 전한(典翰)조종경(趙宗敬)의 손자이고, 호조 좌랑(佐郞)조수륜(趙守倫)의 동생이다.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24)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군자감(軍資監)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어머니에게 자기가 맡은 관직을 지키다가 죽겠다고 울면서 하직하였으나 선조 일행이 갑자기 도성을 빠져나가고 성곽과 대궐이 텅텅 비어버렸다. 그는 어찌할 방도를 모르고 혼자 헤매다가 겨우 임금 일행이 피난간 길을 따라서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였다. 1593년(선조26)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 대교(待敎)로 승진하였고,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로 옮겼다가, 다시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곧 시강원 사서(司書)로 승진하여 지제교(知製敎)를 겸대(兼帶)하였고, 천거를 받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27) 성균관 전적(典籍)과 공조 좌랑을 역임하고, 사헌부 지평(持平)에 발탁되었다. 이때 동인(東人)들은 정철(鄭澈)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면서 최영경(崔永慶)을 무고하게 죽였다고 하며 죄안(罪案)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자 지평조수익은 선조에게 “정철이 국사를 담당하여 최영경의 원통한 죽음을 구원하지 못한 점은 진실로 죄책이 없지 않으나, 정철이 죄를 얽어서 최영경을 죽였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그간의 곡절을 모릅니다. 조정의 의논이 둘로 나누어진 뒤로 사류(士類)가 각기 파당을 내세워 서로 배척하여 그 화가 마침내 나라의 존망과 성패가 어떻게 결정될 줄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신은 정철의 관직을 삭탈하면, 조정에 소요만을 더하게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아뢰어 정철을 위해 변명하고, 사직을 청하였다. 선조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체직하여 예조 정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조수익 외에도 옥당(玉堂)과 양사(兩司)의 관원들 중 몇몇은 동인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다른 의견을 내었다. 수찬(修撰)정엽(鄭曄) · 집의(執義)신흠(申欽) · 사간(司諫)신경진(辛慶晉) · 정언(正言)이시발(李時發) 등이 그러하였는데, 그들도 결국 체직되었다가 외직으로 전보되었다.(『사계전서(沙溪全書)』 권9 「송강정문청공행록(松江鄭文淸公行錄)」 참조)

조수익은 예조 정랑으로 있다가 접반사(接伴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황해도와 평안도로 나가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와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다. 다음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몸이 약해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30) 평안도강서현령(江西縣令)으로 나갔는데, 고을을 훌륭히 다스렸기 때문에, 고을 주민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워서 그의 선정(善政)을 기렸다. 1600년(선조33) 형조 정랑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으며,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으로 옮겼다.

1601년(선조34)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여러 고을을 염찰(廉察)하면서 고을 수령(守令)들의 치적과 민간의 폐단을 살피고, 선조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고,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602년(선조35) 임천군수(林川郡守)로 나갔으나, 갑자기 병이 위독해져서 가마에 실린 채로 과천 집으로 돌아온 후, 6월 9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겨우 38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깨끗하고 조용하여 시끄럽거나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그는 옷조차도 이기지 못할 만큼 몸이 허약하였으나, 그 지조(志操)는 확고부동하였고, 그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할 만큼 힘이 없었으나, 그 논리는 명석하고 분명하였다. 관직에 재임할 때에 명성(名聲)을 위하거나 공렬(功烈) 따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시행하는 일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지론(持論)이 과격하거나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능히 올바른 논의를 이룩할 수 있었다. 집안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데에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 교제하는 데에 신의가 있었던 것은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 조수륜을 따라서 우계성혼에게 수학하여, 1590년(선조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막내 동생 조수인을 가르치고 독려하여, 마침내 동생이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다른 집안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큰형 조수륜이 광해군 때 <신율(申慄)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였고, 조수익과 그 동생 조수인도 30대에 요절하여, 청운의 꿈을 펴보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창고에 남은 재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리에는 색깔 있는 견직물조차도 하나 없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광암리(廣巖里)의 선영에 있고, 부인이 왼쪽에 묻혔다. 친구 영의정신흠(申欽)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호성 선무 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하사 받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 도승지(都承旨) 겸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추증되었다. 부인 원주변씨(原州邊氏)는 참봉(參奉)변순(邊循)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조약(趙瀹)이고, 차남은 조흡(趙潝)이며, 3남은 조확(趙㴶)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상촌집(象村集)』
  • 『간이집(簡易集)』
  • 『기축록(己丑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송강집(松江集)』
  • 『백암집(柏巖集)』
  • 『동강집(東岡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용담집(龍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