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령(朴鳳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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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1년(현종 12)~1718년(숙종 44) = 48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 참판(參判)이다. 자는 공서(公瑞)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박성익(朴成翼)이며, 어머니 대구서씨(大丘徐氏)는 부사(府使)서정리(徐貞履)의 딸이다.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현감(縣監)민종로(閔宗魯)의 딸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99년(숙종 25)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01년(숙종 27)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그 해 가주서(假注書)로 재임 중 경연석상에서 불경스러웠다는 이유로 추고(推考)당하였다. 이후 사서(司書)가 되었다가 여러 번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1705년(숙종 31) 아전(衙前)의 잘못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임금의 잘못을 강력하게 지적하는 등 활발한 언론(言論) 활동을 하여 강직하다는 평을 들었다. 1706년(숙종 32)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문학(文學)이 되었다. 1707년(숙종 33)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이 되었는데, 이때 이유민(李裕民)을 배척하여 임금으로부터 불경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 해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이듬해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로 나갔다.

1710년(숙종 36) 다시 헌납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佐郞)·부수찬·수찬이 되었으며, 1711년(숙종 37) 이조 정랑(正郞)·부교리(副校理)·응교(應敎)가 되었다. 그가 응교가 되었을 때는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 38) 부수찬·교리(校理)·헌납·사인(舍人)·부응교(副應敎)·부교리가 되었다. 1713년(숙종 39) 다시 응교·교리가 되었다. 응교가 되었을 때 임금에게 존호(尊號) 올리는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처음에는 찬성하여 품계가 올라가기까지 하였으나, 나중에는 반대하여 자기 주장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들었다.

1714년(숙종 40) 승지(承旨)가 되었고, 1716년(숙종 42)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가 그 해 승지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임금의 부름에 즉시 따르지 않아 처벌 명령을 받았다. 1717년(숙종 43) 이조 참의(參議)·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며, 이후 예조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1718년(숙종 44) 세자빈(世子嬪)이 사망하였을 때 임금과 왕비의 상복을 정하는데 참여하였으며, 그 뒤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이해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48세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