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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박태손|한글표제=박태손|한자표제=朴泰遜|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정치·행정가/관료/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 중기|왕대=인조~숙종|집필자=박은화|자= 여길(汝吉) |호= 천휴(天休)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641년(인조 19)|사망=1692년(숙종 18)|본관=반남(潘南)|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증조부=(양증조부)박동언(朴東彦) (생증조부)박동열(朴東說)|조부= 박황(朴潢) |부= 박세남(朴世楠) |모_외조=전의 이씨(全義李氏):이행진(李行進)의 딸|형제=(누이)김창집(金昌集)의 처|처_장인=이씨(李氏):이지형(李枝馨)의 딸 →(자녀)4남|자녀=(1자)박필우(朴弼禹) (2자)박필기(朴弼夔) (3자)박필룡(朴弼龍) (4자)박필현(朴弼顯)|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056|실록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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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641년(인조 19)~1692년(숙종 18) = 5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의 문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여길(汝吉)이고, 호는 천휴(天休)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세남(朴世楠)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예조 [[참판(參判)]]이행진(李行進)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박황(朴潢)]]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감역관(監役官)]]을 지낸 [[박동언(朴東彦)]]이다. 증조할아버지의 누이가 선조(宣祖)의 비(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다. 고려시대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의 후손이기도 하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지형(李枝馨)의 딸로, 4남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박필우(朴弼禹)이고, 둘째 아들은 박필기(朴弼夔)이며, 셋째 아들은 박필룡(朴弼龍)이고, 넷째 아들은 [[박필현(朴弼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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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인조 19)~1692년(숙종 18) = 5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의 문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여길(汝吉)이고, 호는 천휴(天休)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세남(朴世楠)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예조 [[참판(參判)]]이행진(李行進)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박황(朴潢)]]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감역관(監役官)]]을 지낸 [[박동언(朴東彦)]]이다. 증조할아버지의 누이가 선조(宣祖)의 비(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다. 고려시대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의 후손이기도 하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지형(李枝馨)의 딸로, 4남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박필우(朴弼禹)이고, 둘째 아들은 박필기(朴弼夔)이며, 셋째 아들은 박필룡(朴弼龍)이고, 넷째 아들은 [[박필현(朴弼顯)]]이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현종~숙종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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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년(숙종 5) 5월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3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4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5년 5월 22일, 숙종 6년 3월 28일, 숙종 6년 4월 13일] 이때 그는 사회 개혁에 대한 7조목의 [[소(疏)]]를 올렸는데, “첫째, 흉악한 말을 분별할 것, 둘째, 강관(講官)을 잘 선택할 것, 셋째, 상벌(賞罰)을 분명히 할 것, 넷째, 대각(臺閣)을 중히 여길 것, 다섯째, 장오죄(贓汚罪)에 대한 처벌법을 엄중히 할 것, 여섯째, 공도(公道)를 회복할 것, 일곱째, [[수령(守令)]]을 엄선할 것.” 등이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5월 6일] 이어 그해 7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검토관(檢討官)]]도 겸하였고, 12월에는 다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7월 8일, 숙종 6년 12월 6일, 숙종 7년 1월 12일] 1681년(숙종 7) 1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校理)]], [[시독관(侍讀官)]], 홍문관 부교리, 이조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1월 16일, 숙종 7년 1월 27일, 숙종 7년 2월 14일, 숙종 7년 4월 9일, 숙종 7년 5월 9일, 숙종 7년 5월 28일] 시독관으로 있을 때, 그는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 등 지방에 있는 여러 학자들을 부르도록 청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8월 6일] 이후 이조 [[정랑(正郞)]]과 사간원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應敎)]],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1월 15일, 숙종 9년 2월 11일, 숙종 9년 2월 29일, 숙종 9년 5월 18일, 숙종 9년 5월 30일, 숙종 11년 7월 4일, 숙종 11년 11월 14일]
 
1679년(숙종 5) 5월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3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4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5년 5월 22일, 숙종 6년 3월 28일, 숙종 6년 4월 13일] 이때 그는 사회 개혁에 대한 7조목의 [[소(疏)]]를 올렸는데, “첫째, 흉악한 말을 분별할 것, 둘째, 강관(講官)을 잘 선택할 것, 셋째, 상벌(賞罰)을 분명히 할 것, 넷째, 대각(臺閣)을 중히 여길 것, 다섯째, 장오죄(贓汚罪)에 대한 처벌법을 엄중히 할 것, 여섯째, 공도(公道)를 회복할 것, 일곱째, [[수령(守令)]]을 엄선할 것.” 등이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5월 6일] 이어 그해 7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검토관(檢討官)]]도 겸하였고, 12월에는 다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7월 8일, 숙종 6년 12월 6일, 숙종 7년 1월 12일] 1681년(숙종 7) 1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과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校理)]], [[시독관(侍讀官)]], 홍문관 부교리, 이조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1월 16일, 숙종 7년 1월 27일, 숙종 7년 2월 14일, 숙종 7년 4월 9일, 숙종 7년 5월 9일, 숙종 7년 5월 28일] 시독관으로 있을 때, 그는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 등 지방에 있는 여러 학자들을 부르도록 청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8월 6일] 이후 이조 [[정랑(正郞)]]과 사간원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應敎)]],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1월 15일, 숙종 9년 2월 11일, 숙종 9년 2월 29일, 숙종 9년 5월 18일, 숙종 9년 5월 30일, 숙종 11년 7월 4일, 숙종 11년 11월 14일]
  
1688년(숙종 14) 1월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시관(試官)]]이 되어 과제(課製)에 『장자(莊子)』 어부편(漁父篇) 중에서 글제를 내었다.[『숙종실록』숙종 14년 1월 10일,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12]  이전부터 과장에서 금지되어 온 노자와 장자의 말에서 [[서제(書題)]]를 삼았다는 이유로, 그는 그 해 6월에 사간원에게서 추고(推考)를 당하였다.[『숙종실록』숙종 14년 5월 15일, 숙종 14년 5월 16일] 이어 그 해 8월에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4년 8월 14일] 1689년(숙종 15) 윤3월 1일 하지사(夏至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정사(正使)홍만용(洪萬容)과 서장관(書狀官)이삼석(李三碩)과 함께 청(淸)나라에 다녀왔다.[『숙종실록』숙종 15년 윤3월 1일] 그런데 이때 그가 승정원 승지로 있을 때 임금을 보필하던 발언이 숙종을 분노하게 하였다며, 같은 달 하순에 극변(極邊)으로 유배되었다.[『숙종실록』숙종 15년 윤3월 26일] 그는 그곳에서 1692년(숙종 18)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1694년(숙종 20) 4월 승정원 승지윤이도(尹以道)와 이동욱(李東郁)의 요청에 의하여 복작(復爵)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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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숙종 14) 1월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시관(試官)]]이 되어 과제(課製)에 『장자(莊子)』 어부편(漁父篇) 중에서 글제를 내었다.[『숙종실록』숙종 14년 1월 10일,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12]  이전부터 과장에서 금지되어 온 노자와 장자의 말에서 [[서제(書題)]]를 삼았다는 이유로, 그는 그 해 6월에 사간원에게서 추고(推考)를 당하였다.[『숙종실록』숙종 14년 5월 15일, 숙종 14년 5월 16일] 이어 그 해 8월에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4년 8월 14일] 1689년(숙종 15) 윤3월 1일 하지사(夏至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정사(正使)홍만용(洪萬容)과 서장관(書狀官)이삼석(李三碩)과 함께 청(淸)나라에 다녀왔다.[『숙종실록』숙종 15년 윤3월 1일] 그런데 이때 그가 승정원 승지로 있을 때 임금을 보필하던 발언이 숙종을 분노하게 하였다며, 같은 달 하순에 극변(極邊)으로 유배되었다.[『숙종실록』숙종 15년 윤3월 26일] 그는 그곳에서 1692년(숙종 18)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1694년(숙종 20) 4월 승정원 승지윤이도(尹以道)와 이동욱(李東郁)의 요청에 의하여 복작(復爵)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4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총론

[1641년(인조 19)~1692년(숙종 18) = 5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의 문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여길(汝吉)이고, 호는 천휴(天休)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세남(朴世楠)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예조 참판(參判)이행진(李行進)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박황(朴潢)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감역관(監役官)을 지낸 박동언(朴東彦)이다. 증조할아버지의 누이가 선조(宣祖)의 비(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다. 고려시대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의 후손이기도 하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지형(李枝馨)의 딸로, 4남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박필우(朴弼禹)이고, 둘째 아들은 박필기(朴弼夔)이며, 셋째 아들은 박필룡(朴弼龍)이고, 넷째 아들은 박필현(朴弼顯)이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73년(현종 14) 1월 진사(進士)였던 박태손(朴泰遜)은 성균관(成均館)에서 시행한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수 있게 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4년 1월 24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14년 1월 24일] 그 해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79년(숙종 5) 5월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3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4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5년 5월 22일, 숙종 6년 3월 28일, 숙종 6년 4월 13일] 이때 그는 사회 개혁에 대한 7조목의 소(疏)를 올렸는데, “첫째, 흉악한 말을 분별할 것, 둘째, 강관(講官)을 잘 선택할 것, 셋째, 상벌(賞罰)을 분명히 할 것, 넷째, 대각(臺閣)을 중히 여길 것, 다섯째, 장오죄(贓汚罪)에 대한 처벌법을 엄중히 할 것, 여섯째, 공도(公道)를 회복할 것, 일곱째, 수령(守令)을 엄선할 것.” 등이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5월 6일] 이어 그해 7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검토관(檢討官)도 겸하였고, 12월에는 다시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6년 7월 8일, 숙종 6년 12월 6일, 숙종 7년 1월 12일] 1681년(숙종 7) 1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校理), 시독관(侍讀官), 홍문관 부교리, 이조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1월 16일, 숙종 7년 1월 27일, 숙종 7년 2월 14일, 숙종 7년 4월 9일, 숙종 7년 5월 9일, 숙종 7년 5월 28일] 시독관으로 있을 때, 그는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 등 지방에 있는 여러 학자들을 부르도록 청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8월 6일] 이후 이조 정랑(正郞)과 사간원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應敎),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1월 15일, 숙종 9년 2월 11일, 숙종 9년 2월 29일, 숙종 9년 5월 18일, 숙종 9년 5월 30일, 숙종 11년 7월 4일, 숙종 11년 11월 14일]

1688년(숙종 14) 1월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시관(試官)이 되어 과제(課製)에 『장자(莊子)』 어부편(漁父篇) 중에서 글제를 내었다.[『숙종실록』숙종 14년 1월 10일,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12] 이전부터 과장에서 금지되어 온 노자와 장자의 말에서 서제(書題)를 삼았다는 이유로, 그는 그 해 6월에 사간원에게서 추고(推考)를 당하였다.[『숙종실록』숙종 14년 5월 15일, 숙종 14년 5월 16일] 이어 그 해 8월에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14년 8월 14일] 1689년(숙종 15) 윤3월 1일 하지사(夏至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정사(正使)홍만용(洪萬容)과 서장관(書狀官)이삼석(李三碩)과 함께 청(淸)나라에 다녀왔다.[『숙종실록』숙종 15년 윤3월 1일] 그런데 이때 그가 승정원 승지로 있을 때 임금을 보필하던 발언이 숙종을 분노하게 하였다며, 같은 달 하순에 극변(極邊)으로 유배되었다.[『숙종실록』숙종 15년 윤3월 26일] 그는 그곳에서 1692년(숙종 18)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1694년(숙종 20) 4월 승정원 승지윤이도(尹以道)와 이동욱(李東郁)의 요청에 의하여 복작(復爵)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0년 4월 4일]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선고(淸選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
  • 『참의선생안(參議先生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