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현(朴弼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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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8년(숙종 4)~1728년(영조 4) = 51세]. 조선 중기부터 후기인 경종(景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와 태인현감(泰仁縣監) 등을 지냈다. 자는 평중(平仲)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양아버지는 박태춘(朴泰春)이고, 친아버지는 이조 참의(參議)박태손(朴泰遜)이다. 양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예조 참판(參判)이행진(李行進)의 딸이며, 생모 이씨(李氏)는 이지형(李枝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세남(朴世楠)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判書)를 지낸 박황(朴潢)이다. 아들은 박사제(朴師濟)이다.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반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경종~ 영조 시대 활동

그는 숙종(肅宗) 대에 유생(儒生)으로 활동하다가, 1723년(경종 3) 10월 감시(監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40년 8월 12일, 『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3년 10월 9일]

1725년(영조 1) 5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가 되었고, 그 해 12월 세자시강원 겸설서(兼說書)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으로부터 간신 박태춘의 아들이라는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 1727년(영조 3) 다시 사간원으로부터 박필현(朴弼顯)은 형들인 박필우(朴弼禹) · 박필기(朴弼夔) · 박필룡(朴弼龍)과 함께 노론(老論)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하였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종하였으며, 정호(鄭澔)를 참소하여 유배시켰다는 등의 제목으로 모두 탄핵을 받았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3년 4월 18일]

그러던 가운데 1726년(영조 2) 이인좌가 상주(尙州)로 이주하였을 때 그와 만나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반란의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묵동(墨洞)에 있는 서제(庶弟) 만호(萬戶)의 집에서 평안병사(平安兵使)이사성(李思晟) 및 호남의 한세홍(韓世弘)과 자주 모여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웠다.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가게 되자 마침 무장(茂長)에 유배되어 있던 종형(從兄) 박필몽(朴弼夢)을 대장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1728년(영조 4) 3월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역모의 윤각이 드러나게 되어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같은 달 16일 중앙에서는 박필현을 태인현감의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신(武臣)을 차출해 보냈다.[『영조실록』영조 4년 3월 16일] 이런 가운데 박필현은 이인좌가 청주(淸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달 19일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태인의 군사를 징발한 후에 금구(金溝)를 거쳐 전주(全州) 삼천(三川)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전주성에서 반란에 가담하기로 약속하였던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정사효(鄭思孝)가 반군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는 태도를 돌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반란 계획이 부하들에게 발각되면서 군사가 궤멸해 도주하였다.[『영조실록』영조 4년 3월 25일]

그러자 박필현은 가속(家屬) 몇 명만을 거느리고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상주의 촌가(村家)에 숨었다가, 상주의 영장(營將)한속(韓㻋)의 부하 장교에게 사로 잡혔다. 그는 “지금 사대부는 남인(南人) · 소북(小北) · 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모두 이 반란에 가담하였으며 평안병사(平安兵使)이사성(李思晟)이 그 맹주(盟主)”라는 흉서(凶書)를 남기고는 1728년(영조 4) 3월 26일 상주진(尙州鎭)에서 아들 박사제와 함께 참수(斬首)되었다.[『영조실록』영조 4년 3월 26일] 이 때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