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洪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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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5년(선조18)∼1643년(인조21) = 59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여시(汝時), 호는 월봉(月峯)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좌랑홍난상(洪鸞祥)이고, 어머니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충의위(忠義衛)구례연(具禮淵)의 딸이다. 대사헌홍이상(洪履祥)의 조카이고, 부마 홍주원(洪柱元)과 4촌간이다. 석주(石洲)권필(權韠)의 문인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금화사(禁火司) 별좌(別坐) ·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을 지내다가, 1615년(광해군7)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보고 벼슬을 단념한 채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면천(沔川)으로 이사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흥해군수(興海郡守)로 나갔다. 돌아와 서반(西班)에 임명되었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갔다. 1627년(인조5) 횡성(橫城)에서 이인거(李仁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재빨리 원주의 군사를 이끌고 횡성 관아를 습격하여 이인거 일당을 체포하였다. 그는 <이인거의 작변(作變)>을 진압한 공으로 소무공신(昭武功臣) 1등에 풍녕군(豊寧君)으로 봉해지고, 1628년(인조6)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 1629년(인조7) 명(明)나라 도독(都督)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를 점거(占據)하고 과도한 군량미를 요구하자, 그는 접반사가 되어, 그 요구를 대폭 줄이도록 모문룡과 협상하였다. 그리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도총관으로 복귀하였다.

1631년(인조9)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632년(인조10) 인조의 부모 원종대왕(元宗大王)과 인헌왕후(仁獻王后)를 추숭(追崇)하고 고명(誥命)을 청하는 주청사(奏請使)가 되었다. 주청사의 정사(正使)는 1품의 3정승이 맡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주청상사(奏請上使)로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풍년부원군(豊年府院君)에 봉해지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 정승이 아닌데도 주청사로 발탁된 것에서 인조가 그를 크게 신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사(副使)이안눌(李安訥) 등과 함께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고명장(誥命狀)과 시호(諡號)를 받아서 다음해에 돌아오니, 인조가 기뻐하며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장원서(掌苑署) 제조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 ·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1635년(인조13) 인렬왕후(仁烈王后)의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었는데,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수릉관(守陵官)으로서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에 병화를 피할 수 있었다. 1637(인조15)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가 1638년(인조16) 진주사(陳奏使)에 임명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는데, 이듬해 그가 회계(回啓)한 내용에 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의 3공 6경이 모두 자제를 심양(瀋陽)에 질자(質子)로 보내기로 약속하였는데, 보내지 않는 대신들이 있었다. 청나라에서 이것을 문제로 삼았으므로, 그가 논변하다가 도리어 심문당하고 당진(唐津)으로 유배되었다. 1641년(인조19) 유배지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유배 생활에서 등창이 생겨서 고생을 하였는데, 인조가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였다. 그러나 1643년(인조21) 12월 3일 등창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9세였다. 그는 임종 전에 자제들에게 “내 지위가 정경(正卿)에 이르렀고 나이도 60세에 이르렀다. 죽고 사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인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한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저서로 『월봉집(月峯集)』이 있다.

이인거의 옥사

이인거는 덕원도정(德源都正)이추(李樞)의 손자로서 광해군 때 강원도 횡성(橫城)에 내려와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인조반정> 후 제천으로 귀양 온 유효립(柳孝立)과 교유하였는데, 그는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의 조카로, 대북파 중에서 죽음을 면한 자들과 연락하며 광해군의 복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횡성 지역에서 유일(遺逸)로 이름났던 이인거는 인조가 후금(後金)과 굴욕적으로 화해한 것을 비난하고 광해군의 정치가 자주적이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강원도관찰사최현(崔晛)을 만나 자신의 주장과 반란을 일으킬 뜻을 보였으나, 최현은 실행불가능한 처사의 큰 소리 정도로 치부하였다.

1627년(인조5) 9월 28일 이인거는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횡성현 관아를 습격하여, 횡성현감이탁남(李擢男)을 사로 잡고 무기를 탈취한 다음, 옥문을 부수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군사를 개편하고 그들의 대장이 되어 ‘창의 중흥 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고 자칭하였다. 이어 서울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고 군사를 일으키면서, 인조에게 자신의 정예군사로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간신들을 죽이고, 오랑캐의 소굴을 정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상소하였다. 이인거가 난을 일으키자 그 지역 유학 진극일(陳克一)은 조정에 고변하였으나, 최현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까 두려워 숨었다.

한편 사로 잡혔던 이탁남은 원주로 도망하여 원주목사홍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삼남 지방에서도 <이인거의 난>에 호응할 움직임을 보이자, 인조는 당황하여 군사를 총동원하여 이인거를 체포하고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서울을 계엄(戒嚴)하고, 가까운 지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새를 지키게 하는 한편, 3남 지방의 병마사(兵馬使)로 하여금 각기 군사를 이끌고 각 도의 경계에서 변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 오숙(吳䎘)을 강원도관찰사로 임명하고, 신경인(申景禋) · 유림(柳琳) · 이일원(李一元)을 토포사(討捕使)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반란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홍보는 토포사의 군사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원주의 군사를 동원하여 10월 2일 밤에 횡성으로 진군하였다. 홍보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보니, 이인거 혼자 현사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달아나고 없었다. 이튿날 수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하였다.

체포된 이인거는 의금부에서 주화파(主和派)를 처단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다고 공술하였다. 그는 형신(刑訊)을 받고도 광해군을 복위하려 했던 사실을 끝내 숨겨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이인거와 그 아들 이자백(李自白)을 비롯하여 고대립(高大立) · 김여약(金汝鑰) · 진광흡(陳光洽) · 고계립(高繼立) · 김득명(金得明)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그해 11월 빈청에서 훈공을 감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의 등급을 정할 때, 홍보는 1등공신이 되어 풍녕군에 봉해졌다. 한편 유효립은 광해군을 상왕으로, 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을 왕으로 추대하는 거사를 준비하다가 1628년(인조6) 정월 3일에 허적(許*)의 고변으로 잡혀, 거사에 참여했던 북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성품과 일화

홍보는 권세와 재리(財利)에 무관심하였다. 또 천성적으로 효도와 우애를 타고났다.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 홍난상을 정성스럽게 받들고 모셨다. 맏형 홍정(洪*)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자녀가 많았으므로, 그는 형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냈는데, 평소에 친척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즐겁게 지내더라도 술에 취하여 남을 희롱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서 싸웠으나, 그는 언제나 중립을 지키며 서로 화해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길이 막혔는데, 그를 잘 모르는 자들은 그를 무능(無能)하다고 여겼으나, 그를 아는 자들은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 직후에 많은 선비들이 응시한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그는 출세를 보장받은 장원랑(壯元郞)이었으나, 청요직(淸要職)의 좋은 자리에 진취(進取)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외방의 작은 고을을 맡아서 행정 경험을 쌓기를 원하자, 전조(銓曹)의 관리들이 그 겸손함을 칭찬하며 흥해군수로 내보냈다. 흥해 고을에서 지방 행정을 익힌 다음, 1626년(인조4) 원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원주는 본래 산골 고을로 영문에 일이 많고 민폐(民弊)가 항상 쌓여서 사람들이 그 자리를 피하였으나, 그는 기꺼이 부임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민간의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면서도, 업무를 과단성있게 추진하였다. 중앙에서는 한성부와 형조의 일을 많이 맡아보았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일을 잘 처리하여,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묘소는 충청도 연기현(燕岐縣) 명학리(鳴鶴里) 언덕에 있는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함안이씨(咸安李氏)는 이성(李晟)의 딸로, 1남 2녀를 낳으니, 아들 홍주세(洪柱世)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을 지냈고, 장녀는 이정원(李正源: 이덕형의 아들)의 처가 되었으며, 차녀는 강문정(姜文井: 강석기 아들)의 처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대동야승(大東野乘)』
  • 『청음집(淸陰集)』
  • 『지천집(遲川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석주집(石洲集)』
  • 『속잡록(續雜錄)』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