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權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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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2)∼1612년(광해군4) = 44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문인. 자는 여장(汝章)이고, 호는 석주(石洲)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예조 참판 권벽(權擘)의 아들이고, 정수충(鄭守忠)의 외손자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는데, 당대의 풍자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야인 생활

그는 과거를 보지 않고 술로 낙을 삼았지만, 세상의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여 시를 지어서 이를 풍자하였다. 그는, 가난을 걱정한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예조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권유에 동몽교관을 그만두고, 강화도로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1599년(선조33) 강화부(江華府) 관원이 뇌물을 받고 아버지를 죽인 죄수를 관대하게 봐주는 것을 보고, 그 잘못을 바로잡고 나서 강화도를 떠나 현석강(玄石江: 현 마포 서강)에 가서 살았다.

1601년(선조34) 이정귀(李廷龜)가 명(明)나라 사신 고천준(顧天俊)의 영접사(迎接使)가 되었을 때, 이정귀는 고천준이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이 높다는 말을 듣고 그 시문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권필을 제술관(製述官)으로 데려갔다. 이때 사진(寫進)한 권필의 시(詩)를 선조가 보고 감탄하여 그것을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보았다.

궁류시 풍자 사건

권필은 광해군의 정치가 점차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였다. 그래서, 광해군 초기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그와 사귀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집에 갔다가 이이첨이 와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담장을 넘어서 피하였는데, 이이첨이 그때부터 그에게 매우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 당시 광해군의 왕비 유씨(柳氏)의 형제 유희분(柳希奮) 등이 임금의 처남이라며 방자한 행동을 많이 하였다. 1611년(광해군3) 문과 전시(殿試)대책(對策)에서 임숙영(任叔英)이 유희분 일당의 방종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합격한 방목(榜目)에서 삭제되었다. 그것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한 권필은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궁중의 유씨 일당을 풍자 비방하였다. 1612년(광해군4) <무고(誣告)의 옥사>가 일어나면서, 광해군이 「궁류시」를 읽어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은 자를 추궁하였고, 권필을 잡아 와서는 직접 혹형(酷刑)을 가하고 국문하였다. 그때 대신(大臣) 이항복(李恒福)이 적극적으로 구원한 덕분에 권필은 사형을 모면하고 경원(慶源)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권필은 본래 몸이 허약했는데, 매우 심하게 혹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들것에 실려 도성문을 나갔다. 그리고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얻어 마시고, 이튿날 44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저서로는『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남아 있다.

무덤과 사평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위양리(渭陽里)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신원(伸寃)되고,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되었다. 전라도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권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논의와 풍도가 당시에 으뜸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당대의 인물들을 모두 사귀었으므로 명성이 대단하였다. 세상일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채 산과 바다를 떠돌면서 시와 술로 즐겼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석주집(石洲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포저집(浦渚集)』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담헌서(湛軒書)』
  • 『미수기언(眉叟記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