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화(鄭萬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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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4년(광해군 6)∼1669년(현종 10) = 56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과 예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일운(一運)이고, 호는 익암(益菴)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정광성(鄭廣成)이고,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정창연(鄭昌衍)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정유길(鄭惟吉)이다. 영의정정태화(鄭太和)의 동생이기도 하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5년(인조 13)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방목(榜目)』]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면서 청(淸)나라 군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을 갔다. 처음에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려고 하였으므로 늙고 병든 신료(臣僚)들에게 먼저 강을 건너게 하였다. 그러므로 정만화(鄭萬和)의 아버지인 정광성도 그의 할아버지 정창연을 부축하고 강외(江外)로 나갔다. 그러나 조금 뒤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나, 이미 길이 막힌 상태였으므로 병화(兵禍)를 피하고자 고향인 수원으로 갔다. 이때 정창연이 촌사(村舍)에서 별세하였다.[『백헌집(白軒集)』 권44 「지돈녕부사정공신도비명(知敦寧府事鄭公神道碑銘)」] 이때 정만화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아버지와 함께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喪禮)에 따라 장례를 치루는 예절을 흡족하게 거행하였다. 3년 상례를 치른 뒤인 1639년(인조 17) 아버지 정광성이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백헌집』 권44 「지돈녕부사정공신도비명」] 이때 정만화는 아버지의 임소(任所)에 따라가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였는데, 난리 때문에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하여 스스로 나태하게 지내지 않았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9 「예조참판정공신도비명(禮曹參判鄭公神道碑銘)」 이하 「정만화신도비명」으로 약칭]

1652년(효종 3)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방목』] 그가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큰형 정태화는 영의정이었고 둘째형 정치화(鄭致和)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였으므로 효종(孝宗)이 이들 부형(父兄)을 위해 특별히 경축하는 교지를 내려주었다.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으나, 아버지 정광성이 교외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항상 돌아가서 시봉(侍奉)하였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임명되고 나서 사관(史官)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큰형 정태화가 춘추관(春秋館) 영사(領事)였으므로, 피혐(避嫌)하여 결국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후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승진하고, 병조의 낭청(郞廳)이 되었다. 1653년(효종 4) 8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진위현령(振威縣令)이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4년 8월 30일, 「정만화신도비명」]

그러나 1654년(효종 5)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례를 치른 후, 1656년(효종 7) 7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고, 10월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12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효종실록』효종 7년 7월 8일, 효종 7년 10월 30일, 효종 7년 12월 17일] 이어 1657년(효종 7) 3월에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5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 6월 이조 좌랑(左郞)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다.[『효종실록』효종 8년 3월 15일, 효종 8년 5월 16일, 효종 8년 6월 13일, 효종 8년 11월 30일] 그리고 1658년(효종 9) 5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8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효종실록』효종 9년 5월 17일, 효종 9년 8월 10일] 그 중간에 삼사(三司)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면서, 수어사(守禦使)의 종사관을 겸임하기도 하였다.[「정만화신도비명」]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승하하자, 5월 국장도감(國葬都監) 도청(都廳)이 되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즉위년 5월 4일] 이어 그해 6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는데, 이조 판서의 유임을 청하는 일에 차질이 생기자 사간원 대사간이정기(李廷夔)의 탄핵으로 체임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즉위년 6월 2일, 현종 즉위년 6월 18일] 8월 다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고, 11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현종실록』현종 즉위년 8월 14일, 현종 즉위년 11월 13일] 12월 왕이 비망기를 내려 혼전도감(魂殿都監)과 국장도감(國葬都監), 그리고 산릉도감(山陵都監)에 상격(賞格)을 시행함에 따라 정만화는 시정(寺正)으로서 흠위(廞衛)에 애쓴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즉위년 12월 10일, 「정만화신도비명」]

1660년(현종 1) 1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고, 1661년(현종 2) 3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1662년(현종 3) 6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현종실록』현종 3년 6월 7일, 현종 1년 1월 29일, 『현종개수실록』현종 2년 3월 18일, 「정만화신도비명」] 얼마 안 되어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풍습의 교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서 힘썼다.[『현종실록』현종 3년 6월 21일] 그러나 그의 아들인 병조 좌랑정재해(鄭載海)가 그를 문안(問安)하고 감영(監營)에 머물다가 갑자기 역질(疫疾)에 걸려서 31세의 나이로 죽자,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서 체직되어 돌아왔다.[「정만화신도비명」]

1663년(현종 4) 2월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고, 3월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10월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현종실록』현종 4년 2월 23일, 『현종개수실록』현종 4년 3월 3일, 현종 4년 10월 14일, 「정만화신도비명」] 1664년(현종 5) 병조 참의를 지내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한결같이 법률대로 정치를 시행하자 모두가 칭송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5년 2월 6일, 현종 5년 2월 10일, 「정만화신도비명」] 그러다가 1665년(현종 6)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5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0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현종실록』현종 6년 5월 18일, 효종 6년 10월 4일] 후에 승지(承旨)로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여 효험이 있자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는 은전이 있었다.[「정만화신도비명」]

1666년(현종 7) 2월 감옥의 죄수를 판결하는 소결청(疏決廳)이 설치되었는데, 정만화가 이상진(李尙眞) 등과 함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7년 2월 5일, 현종 7년 2월 26일] 6월 특명으로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하였는데, 큰형 정태화와 둘째 형 정치화가 모두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푼 적이 있었으므로, 군민(軍民)들의 기대가 컸다.[『현종실록』현종 7년 6월 26일, 『현종개수실록』현종 7년 6월 26일] 평안도관찰사로 지내던 중 흉년이 연달아 들자 정만화는 창고에 보관하던 곡식을 꺼내 평안도의 굶주린 기민(饑民)을 구호하였다. 또한 세종 때 지은 『구황촬요(救荒撮要)』를 민간에 널리 보급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솔잎을 비롯하여 잣나무잎과 무청, 소나무 속껍질[松白皮], 느릎나무 껍질[楡白皮], 칡뿌리[葛根], 도라지, 마 등의 먹을 수 있는 구황(救荒) 식물을 모두 채취하여 먹게 하였다. 그러자 평안도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므로, 다른 도의 기민들까지 평안도로 몰려들었다. 이에 정만화는 죽을 쑤어 그들을 구휼하였다.[「정만화신도비명」]

1668년(현종 9) 8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후 사간원에서 정만화가 평안도관찰사 때 창고의 곡식을 채워 놓지 못하고 전장문서(傳掌文書)도 갖추어 놓지 않았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정만화가 책임을 지고 대사간을 사임하니, 현종이 체직하여 병조 참판으로 좌천시켰다가 그해 11월 다시 대사간에 임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현종실록』현종 9년 8월 29일, 현종 9년 9월 2일 현종 9년 11월 25일, 『현종개수실록』현종 9년 12월 21일] 이때 그가 과천(果川)에 성묘(省墓)를 하러 갔는데, 이미 몸이 아파서 몹시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정만화신도비명」] 1669년(현종 10) 1월 초하루에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천향(薦享 : 제사)하다가 병이 도졌는데, 갑자기 감개(感慨)하여 새벽에 일어나더니 출사표(出師表)를 한 편 외웠다. 그리고 부축을 받아 사당 앞에 이르러 절을 하고 엎드려 슬프게 오열하였다. 그러다가 끝내 그 달 20일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6세였다.[『현종실록』현종 10년 1월 20일]

성품과 일화

정만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타고난 품성이 또래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고, 또 가정교육을 충실하게 받고 자랐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못된 짓을 하거나 사납고 게으른 것을 본 적이 없다.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볼 때엔 몇 줄씩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다. 승지로 재임할 때에 왕에게 지어 바치는 글이 몹시 번다하고 복잡하였는데, 한번 눈으로 보고나면 대번에 명확하게 기억하였으며, 자획(字畫)의 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반드시 잘못된 곳을 살펴서 바로잡았다.[「정만화신도비명」]

17세에 정시(庭試)에 응시하였는데, 김상헌(金尙憲)과 이정구(李廷龜)가 그가 지은 글을 보고 깊이 장려하고 감탄하면서, “장래에 진취할 가능성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으며, 합격하고 나자 인조가 서책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과격하게 남보다 나서지도 않고 줏대 없이 남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오직 정도(正道)만을 지켰다. 비록 대가(大家)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는 데 반드시 몸소 온 힘을 다하였다.[「정만화신도비명」]

한편으로는 사람됨이 자잘하고 각박하여 본래 취할 만한 점이 없었다. 부형의 음덕으로 내외직을 두루 거치다가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10년 1월 20일] 또한 “정만화는 사람됨이 잗달아 그저 각박하게 세세히 살피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일찍이 승지로 있으면서 각사(各司)를 몹시도 다그쳤는데, 예조의 아전이 낭관에게 소보(小報)로 통지하면서 ‘본조엔 별 일이 없는데, 정 승지가 정원에 입직(入直)해 있다.’고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대사성서필원(徐必遠)이 정만화와 젊어서부터 서로 친했었는데 정만화의 옳지 못한 점을 보고는 늘 섬인(憸人)이라고 칭하더니 이어 그와 절교하고는 같은 당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현종실록』현종 3년 6월 7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정만화신도비명」]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심기주(沈器周)의 딸이다. 장남 정재해(鄭載海)좌랑(佐郞)을 지냈고, 차남은 정재한(鄭載漢)이다. 장녀는 참봉(參奉)이영(李泳)에게, 차녀는 진사(進士)황이명(黃爾明)에게, 3녀는 이명상(李命相)에게 각각 시집갔다.[「정만화신도비명」]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서계집(西溪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포저집(浦渚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청계집(淸溪集)』
  • 『서계집(西溪集)』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노암집(魯庵集)』
  • 『양와집(養窩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