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후(任有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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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1년(선조 34)~1673년(현종 14) = 73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공조 참판(參判)과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효백(孝伯)이고, 호는 만휴(萬休) 또는 만휴와(萬休窩)이며,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임수정(任守正)이고, 어머니 우봉 김씨(牛峰金氏)는 병사(兵使)김우서(金禹瑞)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임국로(任國老)이다. 인조 대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낸 팔촌형 임숙영(任叔英)에게 수학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에 합격하였고, 2년 뒤인 1626년(인조 4)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후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동생 임지후(任之後)가 숙부인 임취정(任就正) 등과 광해군(光海君)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오히려 숙부를 고발하는 바람에 숙부가 참형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6년 3월 4일, 인조 6년 10월 11일, 인조 7년 3월 5일] 이에 임유후(任有後)는 관직을 그만두고 울진(蔚珍)에 은거하며 강학에 힘썼다.[『염헌집(恬軒集)』 권34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임공행장(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任公行狀)」 이하 「임유후행장」으로 약칭]

1633년(인조 11)에 거창현감(居昌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듬해 거산찰방(居山察訪)에 임명되어 한 해가 채 안 되어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관동(關東)에 있는 창의사(倡義使)이현영(李顯英)을 따라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해산하고 돌아왔다. 1638년(인조 16)에 강도도사(江都都事)에 임명되었고, 1640년(인조 18)에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45년(인조 23)에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그 해에 병환으로 면직되었다.[「임유후행장」]

효종(孝宗)이 즉위하던 1649년(효종 즉위년) 울진에서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복상(服喪) 기간 동안 자신의 몸이 망가지도록 예(禮)를 다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4년 7월 2일] 이에 1653년(효종 4)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여 임유후의 효행과 재능을 들어 천거하자, 임유후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4년 7월 2일, 효종 4년 7월 3일, 효종 4년 9월 21일, 「임유후행장」] 1655년(효종 6)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고, 1658년(효종 9)에는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9년 11월 21일, 「임유후행장」] 이때 그는 부내(府內) 기강을 바로 잡고 허물어진 관사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백성들의 부세(負稅)를 덜어주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는데 힘을 썼다.[「임유후행장」]

현종시대 활동

1660년(현종 원년)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기근이 발생하였으나 부민(府民)의 규휼에 힘써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어사(御使)가 이러한 그의 치적을 알렸지만, 가선대부(嘉善大夫)로의 가자(加資)는 지나치다는 대간(臺諫)의 간쟁으로 취소되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2년 6월 17일, 「임유후행장」] 1663년(현종 3)에는 승정원 승지(承旨), 1664년(현종 4)에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4년 11월 24일, 현종 5년 1월 25일]

1667년(현종 8년)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임명되었고, 이때 흉년이 들어 진휼한 공적을 균전사(均田使)민유중(閔維重)이 개진하자 자급을 올려주었다.[『현종실록』현종 10년 3월 19일] 이어 1670년(현종 11)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판이 되었다.[『현종실록』현종 11년 2월 26일] 그러자 사간원 정언(正言)윤지선(尹趾善)이 집안의 변괴, 즉 숙부의 일을 언급하며 관직이 지나치니 체직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나 현종이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과의 인연을 끊었음에도 윤지선이 경솔하게 논핵하였다며 윤지선을 체직시켰다.[『현종실록』현종 11년 4월 25일, 현종 11년 5월 1일]

그리고 그해 8월 다시 공조 참판이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672년(현종 13) 경기도관찰사 및 호조 참판을 거쳐, 곧 경주부사(慶州府使)가 되었다.[『현종실록』현종 12년 5월 29일, 현종 13년 3월 9일, 『현종개수실록』현종 11년 8월 29일, 현종 13년 6월 3일, 현종 13년 윤7월 23일] 1673년(현종 14년) 8월 28일 향년 73세로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광주(廣州)의 고향으로 돌아가 묻혔다.

성품과 일화

임유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자질이 명철한데다가 학문으로 확충하여 언론이 온화하고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여 모남이 있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백성을 대하고 일을 다스릴 적에 근면하고 면밀하게 세세한 일도 모두 다 거행하였으므로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이 추모하였다.[「임유후행장」]

한편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초빈(草殯)을 하지 않았을 적에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았고 이미 장사를 치른 뒤에는 오직 솔잎과 상실(橡實)만 먹었으며, 혹은 미음을 마시면서 조석을 연명한 채 채소, 간장, 된장 같은 것은 모두 먹지 않았다. 또 묘소의 곁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새벽과 저녁이면 반드시 묘소에 절을 하였다. 어머니 상을 끝마친 후에는 다시 고기를 먹지 않고 다시 3년간 심상(心喪)을 하였다. 이렇게 전후 6년간 야윈 용모와 슬퍼하는 모습에 친척과 이웃사람들이 너나없이 감동하면서도 무사히 지탱해낸 것에 대해 괴이하게 여기었다.[『현종실록』현종 11년 5월 1일, 「임유후행장」]

묘소와 후손

임유후의 시호는 정희(貞僖)이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5년 11월 20일]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에 조성되었으며,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임유후행장」] 효행을 인정받아 숙종(肅宗) 대에 정려(旌閭)되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울진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33년 11월 7일]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삼걸(金三傑)의 딸인데, 자녀가 없어 형의 아들 임익등(任翊登)을 후사로 삼았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염헌집(恬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