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준(尹廷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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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0년(선조 23)∼1624년(인조 2) = 45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무신. 옹진부사(瓮津府使) 등을 지냈고, 병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파령군(坡寧君)의 봉작을 받았고, 자는 수백(秀伯)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윤경(尹瓊)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 명송수(明松守) 이운(李芸)의 딸이다. 생부는 윤무(尹珷)이고, 생모 유씨(柳氏)는 생원(生員)유황(柳璜)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정랑(正郞)을 지낸 윤흥인(尹興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라버니로서 대윤(大尹)으로 불리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윤임(尹任)인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괄(李适)의 난(亂)> 때 반란군을 진압하다가 포로가 된 후 난자되어 죽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그때 박승종(朴承宗)과 박자흥(朴子興) 부자가 대대로 집안 간에 교분이 있었다고 하여 그를 불렀으나, 거절하고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 선전관의 임기가 차서 승진하게 되었는데, 병조 판서박승종이 실직(實職)을 주지 않고 사과(司果)에 임명하였다.[『포저집(浦渚集)』 권32 「통훈대부옹진현령증병조판서파녕군윤공묘갈명(通訓大夫甕津縣令贈兵曹判書坡寧君尹公墓碣銘)」 이하 「윤정준묘갈명」으로 약칭] 이후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16년(광해군 8)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윤정준묘갈명」] 그리고 1617년(광해군 9) 나라에서 성을 쌓았는데, 윤정준(尹廷俊)이 섬돌과 주춧돌을 많이 바쳤으므로, 그 공로로 1618년(광해군 10) 벽동군수(碧潼郡守)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9년 11월 27일, 「윤정준묘갈명」]

이 무렵 명(明)나라는 후금(後金)과 전쟁 중이었는데, 광해군은 이 싸움을 관망하면서 이중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1618년 2월 명나라경략(經略)양호(楊鎬)가 무순(無順)의 사르후산에서 후금의 누르하치팔기(八旗)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였고, 이에 명나라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는 광해군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것에 보답하려는 뜻을 보이고자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에게 원군을 이끌고 가서 명나라를 도와주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항복하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때 벽동군수윤정준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박엽(朴燁)의 지휘를 받고 원정군에게 군량미와 말꼴을 운반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길이 험하여 쉽지 않았는데, 결국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회인(懷仁)에서 벌인 <심하(深河)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강홍립은 군사를 거두어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박엽은 조선의 원정군에게 군량미와 마초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 책임을 오로지 윤정준에게 전가시켰으므로, 윤정준은 벽동군수에서 파직당하였다.[「윤정준묘갈명」]

인조 시대의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옹진현감에 임명되었다.[「윤정준묘갈명」]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윤정준은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명령을 받고 예성강의 마탄(馬灘)을 수비하였는데, 친구이던 풍천부사(豊川府使)박영신(朴榮臣)과 함께 이괄의 반란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반란군의 지도자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이 그들에게 반란군에 합류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두 사람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반역한 죄를 꾸짖다가 온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을 정도로 난자당하여 죽었다. 그해 1월 23일 이괄의 임시 막사에서 참화(慘禍)를 당하였는데, 그때 윤정준의 나이가 45세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년 4월 30일]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그 충성을 표창하고 증직(贈職)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에 윤정준은 파령군에 봉해지고, 병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인조실록』인조 2년 2월 7일, 『임하필기』 권33] 그러나 윤정준의 집이 가난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낼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장사지낼 물품을 하사하도록 청하니, 인조가 장례 지낼 물품을 하사하였다.[『인조실록』인조 2년 4월 30일] 그리고 숙종(肅宗) 대에 들어 1684년(숙종 10) 윤정준은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이어 1717년(숙종 37)에는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0년 3월 11일, 숙종 37넌 9월 25일, 숙종 43년 8월 27일, 『일성록(日省錄)』정조 10년 3월 2일]

성품과 일화

윤정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키가 9척이나 되고 생김새가 우람스러워서, 누구나 그를 보면 장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나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싫어하였고, 술을 좋아하였으나 떠들면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가 교유(交遊)하는 사람들은 모두 호협(豪俠)한 무장이나 기개(氣槪)가 있는 선비들이었는데,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 풍천부사박영신과 가장 친하였고 서로 의기(義氣)가 투합하였다.[「윤정준묘갈명」] 김응하는 심하전투 때 전사하였고, 박영신은 이괄의 난 때 윤정준과 함께 반란군에게 생포되어 순절하였다. 또한 이때 항상 윤정준의 곁을 지키던 종 결이(玦伊 : 깍지)가 윤정준의 죽음을 보고 바다에 빠져죽었다.

광해군 시대 때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가서는 임금을 연민하는 뜻으로 10여 장의 가사를 지었는데, 윤정준이 그 가사를 베껴서 여종과 첩에게 전해주고 그녀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정권의 핵심 인사였던 이이첨(李爾瞻)의 식객 노릇을 하던 그의 족형(族兄) 안검(安儉)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 노래를 듣고 “그대는 어찌 감히 여자 아이들에게 이 곡을 가르쳤다는 말인가.” 하니, 그가 “형님은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 이이첨)을 알고 나는 오성(鰲城 : 이항복) 대감을 사모하니, 그것은 각자의 뜻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노래를 부르도록 명하니, 안검이 노하여 화를 내고 가버렸다는 일화가 전한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33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고, 조익(趙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정준묘갈명」] 김천(金泉)에 있는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왕자 경녕군(敬寧君)의 4세손인 이중경(李仲慶)의 딸이다. 아들은 없고 딸이 하나 있었는데, 만호(萬戶)김여준(金汝俊)의 처가 되었다. 양자(養子)는 윤제(尹隮)이고, 서자는 윤승(尹陞)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문곡집(文谷集)』
  • 『서계집(西溪集)』
  • 『지호집(芝湖集)』
  • 『수촌집(水村集)』
  • 『만정당집(晩靜堂集)』
  • 『소재집(疎齋集)』
  • 『죽천집(竹泉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