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尹復)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 = ?].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문신.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자는 원례(元禮)이고, 호는 행당(杏堂), 또는 석문(石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거주지는 전라도 해남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윤효정(尹孝貞)이며,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정호장(鄭戶長)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지낸 윤경(尹耕)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윤사보(尹思普)이다. 아버지 윤효정은 연산군(燕山君) 때 사화(士禍)를 피하여 전라도 해남의 바닷가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스스로 ‘어초은(魚樵隱)'이라고 일컬었다.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윤구(尹衢)와 광주목사(光州牧使)윤행(尹行)의 동생이자, 예조 판서(判書)윤의중(尹毅中)의 삼촌이기도 하다. 유희춘(柳希春)・박성건(朴成乾)・노이문(盧以文)과 절친한 사이였다.[『송사집(松沙集)』 권26]

종종~명종 시대 활동

1538년(중종 33) 별시(別試) 문과에 갑과(甲科) 2등 아헌(亞獻)으로 급제하여,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방목(榜目)』]

명종(明宗) 대에는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 일파가 정권을 잡자, 윤복(尹復)의 큰 형 윤구(尹衢)가 사림파로 몰려 고향 해남(海南)으로 돌아갔다. 이에 윤복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지방관으로 나가서 부안현감(扶安縣監)과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부안 현감으로 있을 때 조운(漕運)할 큰 배를 건조하였는데, 소윤의 실권자인 영의정이기(李芑)가 그 배를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 1553년(명종 8) 9월 낙안군수로 있을 때에는 소윤의 이조 판서(判書)송세형(宋世珩)이 윤복에게 사사로이 부탁하였는데, 윤복은 답서를 보내 그를 책망하고 거절하였다.(『명종실록』 8년 9월 19일)

1566년(명종 21)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자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이황(李滉)을 찾아간 후 세 아들을 보내어 그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선조가 즉위하여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하자, 그는 조정으로 돌아와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1년(선조 4) 9월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에 임명되었고, 1572년(선조 5) 9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12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4년 9월 10일),(『선조실록』 5년 9월 14일),(『선조실록』 5년 12월 13일) 이어 1573년(선조 6) 1월에는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가 2월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윤복이 몸이 아파 사임하는 글을 올리자 그해 3월 선조가 그에게 몸조리할 동안의 말미를 주었다.(『선조실록』 6년 1월 10일),(『선조실록』 6년 2월 25일),(『선조실록』 6년 3월 2일) 그리고 몸이 회복되자 그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겼다.(『선조실록』 6년 3월 22일),『선조실록』 6년 3월 27일 3번째기사] 그러나 곧 조강(朝講)에 들어가서 응대(應對)를 잘못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다.(『선조실록』 6년 4월 2일) 4월에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6월에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그해 9월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나갔다.(『선조실록』 6년 4월 18일),(『선조실록』 6년 6월 22일) 전라도 장흥은 왜구가 출몰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장흥부사윤복은 본래 궁마(弓馬)의 재주가 없는 서생(書生)인데, 군려(軍旅)의 일을 맡겼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윤복을 장흥부사에서 체차한 후 바로 충청도관찰사로 임명하였고, 이어 10월에는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하였다.(『선조실록』 6년 9월 18일),(『선조실록』 6년 9월 19일),(『선조실록』 6년 10월 28일)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1930년에 후손 윤주헌(尹柱憲)이 그의 시문을 모아서 5권 3책으로 편집한 『행당유고(杏堂遺稿)』를 간행하였다. 윤복은 글씨도 잘 썼는데, 그의 유묵은 『현친유묵(賢親遺墨)』에 남아 있다. 이 책은 윤문거(尹文擧)가 이황·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세 현인(賢人)의 유묵(遺墨)과 그의 선조(先祖)인 윤복 등의 친필을 모아서 2권으로 만든 것이다. 윤문거가 정약용(丁若鏞)에게 책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정약용이 책 이름을 『현친유묵』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14]

안동부사 윤복과 도산서원의 이황

1565년(명종 20) 겨울에 윤복이 안동부사에 부임한 후 도산서원에 찾아가서 이황을 만났다. 수령이 처음으로 고을에 부임하면, 그 지방의 유명한 인사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이황은 윤복을 만나고 순수하며 조용한 사람으로 느껴 그를 정중하게 접대하였다. 그때 윤복이 예단을 주었는데, 이황은 별생각 없이 예단을 받고 그 자리에서 펴 보지 않았다. 윤복이 하직하고 돌아간 뒤에 방에 들어가서 예단을 펴서 보니, 그것은 노루 고기와 전복이었다. 그날은 마침 이황의 집에 제사가 있었으므로, 이황은 곧 편지와 함께 예물을 돌려보냈다. 제삿날에 고기를 받는다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12월 24일 성종의 기일(忌日)에 그 제자 조목(趙穆)이 스승에게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왔을 때에도 이황은 기일이라고 하여 그 고기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퇴계집(退溪集)』 언행 2]

이후 이황이 윤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내 “전에도 간혹 기일을 만나 손님을 대접하게 되었을 때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의 기일 때문에 손님을 소찬(素饌)으로 대접하는 것은 아주 미안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손님이 주는 고기를 받아 두었다가 뒷날 먹는다고 하면, 이것은 더욱더 부당한 일이기 때문에 감히 고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저께 단자(單子)를 받았을 적에 미처 살펴보지 못하였다가, 날이 저문 뒤에야 그 속에 노루고기와 전복 등의 물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하여 그냥 둔다면 전에 생각했던 것이 헛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재차 사양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삼가 사람을 보내어 두 가지 물품을 하인에게 돌려 드립니다. 삼가 미약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나 윤복은 노하지 않고, 기일에 고기를 사양하여 받지 않는 것은 상정(常情)에서는 통하지 않는 일이지만, 이황의 세밀한 마음 씀씀이가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는 바라고 생각하여 도리어 존경하였다.[『사계전서(沙溪全書)』 권42]

그리고 윤복은 아들 윤강중(尹剛中)·윤흠중(尹欽中)・윤단중(尹端中) 3형제를 데리고 도산서원으로 함께 찾아가서 아들들에게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윤강중·윤흠중 형제는 이황에게 『주서서(朱書書)』의 어려운 부분을 자세히 물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윤강중 3형제가 안동(安東)의 부사 관사(官舍)로 돌아올 때 이황이 윤복에게 시를 보냈다. 윤복과 이황과의 관계는 관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존경하는 깊은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특히 둘째 아들 윤흠중은 이황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가서 도학자(道學者)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는 과거를 보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하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해남에서 은일(隱逸)로 남았다.

성품과 일화

윤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정직하고 절개가 굳었다. 평생에 문학(文學)을 매우 좋아했고, 남들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명종실록』 8년 9월 19일) 이황은, “윤복의 사람됨이 순수하고 조용하다”고 평하였다.[『퇴계집』 권12]

일찍이 윤복이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관청에서 쓸 큰 배를 제조한 적이 있었다. 영의정이기가 그 소문을 듣고 세 번 편지를 보내서 자기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당시 영의정이기는 윤원형의 소윤의 핵심인물로서 권력이 막중해서 만약 자기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큰 화를 입혔다. 윤복과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그를 위하여 그 요청을 들어주라고 권유하였으나, 윤복은 단연코 거절하면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 출세하고 못하는 것은 모두 하늘에 달려 있다. 영의정이기가 아무리 권력이 세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명종실록』 8년 9월 19일)

1553년(명종 8) 윤복이 낙안군수로 있을 때에는 소윤 출신의 이조 판서송세형이 윤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적으로 부탁한 일이 있었다. 윤복은 곧장 답장을 보내어 그를 책망하기를, “사군자가 재상이 되었으면, 마땅히 밝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지, 이처럼 구차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송세형이 이 글을 받고 부끄러워하면서 나중에 그를 만나서 사과하였다.(『명종실록』 8년 9월 19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해남군 문소(聞簫)에 있다.

첫째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응원(申應元)의 딸이고, 둘째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윤순(尹洵)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낳았다. 장남은 윤강중(尹剛中)이고, 차남은 윤흠중(尹欽中)이며, 3남은 윤단중(尹端中)이다. 이익(李瀷)은 윤강중・윤흠중・윤단중 3형제와 외4촌간인데, 『성호전집(星湖全集)』에서 3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둘째 윤흠중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나의 외4촌 윤흠중은 자가 중일(仲一)이고 호는 석문(石門)인데, 해남에서 살았다. 윤구(尹衢)의 조카로서 이황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수학하였는데, 이황보다 56세나 아래였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해남에 은거하다가, 나이는 51세에 죽었다. 그의 부친은 관찰사윤복인데, 안동부사를 지낸 적이 있어 이황과 왕복한 편지가 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성호전집』 권68]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퇴계집(退溪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송사집(松沙集)』
  • 『행당유고(杏堂遺稿)』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명재유고(明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