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수(兪大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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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6(명종 1)∼1586(선조 19) = 41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옹원(司饔院)정(正)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고, 자는 사영(思永)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유함(兪涵)이고, 어머니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안한준(安漢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호조 판서(判書)를 지낸 유강(兪絳)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지낸 유여림(兪汝霖)이다. 이황(李滉)과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기도 하다.

선조 시대 활동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565년(명종 20)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방목(榜目)』]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승정원(承政院)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569년(선조 2)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으며,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직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즉위년 11월 5일, 『간역집(簡易集)』, 「유대수의 묘갈명」 이하 「유대수의 묘갈명」] 성균관(承政院)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좌랑(佐郞)과 호조 좌랑,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나가서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하다가 영남(嶺南) 지방에 어사(御史)로 파견되었다. 돌아와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으며, 예조를 거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으로 전직(轉職)되었고, 성균관 사예(司藝)로 임명되어 사헌부 장령을 겸직하였다.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다시 사헌부 장령을 겸하였다. 얼마 후 호서(湖西) 지방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나갔는데, 구설수에 올라 파직되었다.

외직으로 나가서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보임(補任)하였는데, 당시에 큰 흉년이 든 상황에서 때에 맞게 적절히 구휼 정책을 펼쳐서 칭송을 들었다.[「유대수의 묘갈명」] 내직으로 들어와 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이 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상의원(尙衣院)정(正)군기시(軍器寺) 정이 되었으며, 그 뒤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외직으로 나갔다가 조정에 들어와 사옹원(司饔院) 정과 내섬시(內贍寺) 정이 되고 다시 사헌부 장령을 겸하였다. 1581년(선조 14) 도청낭청(都廳郎廳)으로 정릉(靖陵)의 정자각 축대 보수공사를 감독했는데, 이듬해 폭우로 축대가 무너져서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15년 7월 16일] 1584년(선조 17)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임명되어서, 중앙의 권문세가(權門勢家)와 결탁한 토호(土豪)들을 다스리던 가운데,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 사간원에서 유대수(兪大脩)가 형벌을 잔혹하게 적용하여 죽는 사람이 잇따른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18년 윤9월 11일, 「유대수의 묘갈명」] 1586년(선조19) 사제(私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41세였다.

성품과 일화

유대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우람하였으며 풍채가 준수한 데다 언어가 침착하면서도 논리 정연하였다. 세속의 흐름에 같이 휩쓸리기를 좋아하지 않고 홀로 옛사람의 풍도를 사모하였으며, 노닐 적에는 반드시 한 시대의 명사들과 함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도 그들의 추중(推重)을 받곤 하였다. 또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혼자 한가로이 거할 적에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범하기 어려운 늠름한 기상을 견지하였으므로, 규문(閨門)의 안이 마치 조정처럼 숙연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병환이 위독해졌을 때에는 부인을 모두 물리친 가운데 죽음을 바르게 맞는 도리를 엄정하게 고수하였다.[「유대수의 묘갈명」]

묘소와 후손

유대수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선영(先塋) 옆에 안장하였다.[「유대수의 묘갈명」]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호조 판서송기수(宋麒壽)의 딸인데, 자녀는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유경증(兪景曾)은 진사(進士)였고, 차남 유학증(兪學曾)은 시정(寺正)을 지냈다. 장녀는 판결사(判決事)이심(李愖)에게 시집을 갔고, 차녀는 참판(參判)이상신(李尙信)에게 시집을 갔으며, 3녀는 찰방(察訪)김선여(金善餘)에게, 4녀는 사인(士人)홍율(洪栗)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역집(簡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