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망(辛應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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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5년(선조 28)∼1654년(효종 5) = 60세.]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냈다. 자는 자상(子尙) · 희상(希尙)이고, 호는 한사(寒沙)이다.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영광(靈光)이다. 아버지는 신장길(辛長吉)이고, 어머니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이안당(李安鐺)의 딸이다. 동생 신응기(辛應期)와 함께 수은(睡隱)강항(姜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소은(素隱)신천익(愼天翊)의 지도를 받았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고, 1624년(인조 2)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방목(榜目)』] 그때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서 영의정신흠(申欽)이 전라도에서 식량을 모집하고자 하여, 그 고장 사람으로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자 5명을 대동하고 갔었는데, 신응망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반란이 수습된 다음에 1626년(인조 4)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어 정자(正字)로 승진하였고, 1627년(인조 5)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5년 4월 18일 · 5월 18일] 그때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주서신응망은 괴원(槐院)의 신진(新進)으로 있을 때 어가(御駕)가 서울을 떠나는 날 호종(扈從)하지 않았으며, 본직을 제수 받고도 말미를 받아서 남쪽 고향을 왕래하면서 폐를 끼친 일이 많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인조가 교체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영의정신흠이 인조에게 차자(箚子)를 올려서 그를 변명하자, 인조가 대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니, 대간의 논죄하여 아뢴 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다.”하고,[『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5년 11월 1일 · 11월 2일] 신응망을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하였다.

1628년(인조 6) 신응망이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외직을 자청하여, 전라도흥양현감(興陽縣監)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9월 5일] 흥양은 지금의 전라도 고흥군 남양면이다. 1629년(인조 7)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유경집(柳景緝)이 아뢰기를, “흥양현감신응망이 술에 취해서 고을의 관비(官婢)를 장살(杖殺)하였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인조가 대답하기를, “신응망은 추고(推考)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5월 12일] 이리하여 흥양 현감에서 파직되어,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630년(인조 8) 전라도함평현감(咸平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조정으로 돌아와서 공조 정랑 ·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631년(인조 9)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어, 각 고을의 향교생(鄕校生)을 낙강(落講)시키는 일을 법전(法典)의 규정대로 하지 않는다고 파직되었다. 그때 병조에서 계사(啓辭)를 올리기를, “교생(校生)을 강(講)에서 도태시키는 것은 바로 법전에 실려 있으며, 새로운 규정이 아닙니다. 옛날 문경(聞慶) 한 고을에서만 낙강한 자가 8인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문경 · 함창(咸昌) · 용궁(龍宮) 세 고을에서 한 사람도 도태된 자가 없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듣건대, 도사신응망이 특히 남들에게 널리 명예를 구하고자 하여, 성산(星山)의 교생의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르는데도 단지 두 사람만 도태시켰으니, 어찌 이처럼 아이들 장난과 같이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응망을 추고하소서.” 하니, 인조가 신응망을 체포하여 추고하게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9년 12월 9일] 그리하여 전라도 영암으로 돌아와서 10여 년 동안 칩거하였는데, 초가 별장을 지어서 많은 책들을 읽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소은신천익을 찾아가서 학문을 토론하고, 그 지도를 받았다.

1642년(인조 20)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에 임명되어, 청(淸)나라 사신의 왕래하는 데에 대접를 소홀하게 하였다고 청나라 역관(譯官)정명수(鄭命壽)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였다. 청나라 칙사(勅使)박씨(博氏) 등이 꼭두새벽에 황주(黃州)를 떠났는데, 역관 정명수는 길가에 횃불을 드물게 꽂아서 칙사의 길이 어둡다고 하여, 크게 노하여 도사신응망을 잡아다가 갓을 벗기고 칙사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 채찍으로써 말처럼 때리면서 몰고 다니디가, 서흥(瑞興)에 이르러서 풀어주었다.[『인조실록』인조 20년 12월 9일] 역관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殷山) 출신 관노로서 청나라 이름이 굴마홍[古兒馬紅]이다. 정명수는 광해군 때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그곳에 살면서 여진어(女眞語)를 배워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용골대(龍骨大) 등의 통역으로 나와서 청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 뒤에 정명수는 청나라 사신의 통역관으로 자주 나와서 온갖 노략질을 하면서 조정의 대신들을 능욕하고 조정의 관리들을 마구 구타하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17] 그러므로 심양(瀋陽)의 질자관(質子館)에서 필선(弼善)정뇌경(鄭雷卿)과 서리(書吏)강효원(姜孝元)이 몰래 그를 암살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정명수는 용골대와 함께 조선에서 청나라에 세폐(歲幣)로 바치는 물건들을 착복하다가 발각되어, 청 태종(太宗)홍타지에게 죽음을 당하였다.[『순암집(順菴集)』 권7권 「고시강원 필선 증찬성 운계 정공행장(故侍講院弼善贈贊成雲溪鄭公行狀)」]

그 뒤에 신응망은 공청도 도사(公淸道都事)를 역임하였는데, 안팎의 관직을 드나들면서 명성이 드높았다.[『소은유고(素隱遺稿)』 권1 「신응망 묘갈명(辛應望墓碣銘)」] 1646년(인조 24)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인조실록』 24년 12월 19일) 모친상을 당하여 사임하고 고향 영암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49년(인조 27) 상례를 끝마치자마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청나라 칙사가 자주 왕래하여 접대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사직하고 고향 영암으로 돌아왔다.

1649년 5월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고향에 가까운 장흥현감(長興縣監)에 임명되었다. 1653년(효종 4) 장흥 사람 김납(金鑞)의 집에서 종 병생(丙生)이 그 주인을 죽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장흥현감신응망이 이를 숨기고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으나, 관찰사가 이것을 알고 조정에 보고하여, 신응망은 현감에서 파직당하고, 종 병생은 극형(極刑)에 처해지고, 그 고을의 등급을 낮추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 효조 4년 11월 25일]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중요시하던 사회에서는 종이 주인을 죽이는 행위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역적 행위와 같이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신응망은 고향 영암으로 돌아왔으나, 부인 김씨가 돌아가고 두 아들이 먼저 죽자, 세상사는 것이 즐겁지 않아 술을 더욱 많이 마셨다. 1654년(효종 5) 2월 13일에 갑자기 병이 나서 영암의 초가 별장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0세였다.[『소은유고』 권1 「신응망 묘갈명」]

성품과 일화

신응망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만나면 즐겁게 담소(談笑)를 나누며 마음을 털어놓았으므로 온 좌석이 즐거워하였다. 벼슬살이할 적에는 일을 맡아서 과감하고 엄격하게 처리하니, 간교한 서리들이 감히 털끝만큼도 그를 속이려는 마음을 먹지 못하였다.[『소은유고』 권1 「신응망 묘갈명」]

원래 신응망의 집안은 전라도 영암의 토반(土班)으로서 넉넉한 집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쟁 중에 아버지가 가산(家産)이 탕진하고, 일찍 돌아갔다. 홀로된 어머니가 신응망과 신응기 형제를 키우면서, 식량을 꾸어서 끼니를 이어 갔지만, 수은강항의 문하에 두 아들을 보내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신응망 형제는 자랄수록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그 명성이 높아졌다. 시문(詩文)에 능하다고 소문이 나서, 서울의 서양갑(徐羊甲) 등이 찾아와서 시를 짓고 교우 관계를 맺었다.[『소은유고』 권1 「신응망 묘갈명」] 서양갑은 서울의 명문 집안 출신이었으나, 서자이기 때문에 벼슬길이 막히자, 서자 출신 친구 박응서(朴應犀) 등을 모아서 ‘죽림 7우(竹林七友)’를 만들어 술을 마시고 세상을 원망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죽림 7우’는 광해군 초기에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화 6천 7백 냥을 약탈하였다는 혐의로서 체포되었다. 대북(大北)의 실권자 이첨(李爾瞻)은 박응서에게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돈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옹립 자금으로 조달하려고 약탈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였다. 이것을 빌미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귀양보내 죽이고,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처형하였다. 옥사가 확대되어 서인(西人)의 많은 사람들을 사건에 연루시켜서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때 서자 출신 7명을 ‘칠서일당(七庶一黨)’이라고 불렀는데, 박응서 한 사람만 살아남고, 그 밖의 서양갑 등 6인은 모두 처형되었다.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던 자들이 고문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함정에 빠뜨렸다. 처음에 박응서의 공초에 신응망 · 신응기 형제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는데, 여주 목사(驪州牧使)심언명(沈彦明)이 서양갑과 신응망 · 신응기 형제가 같이 어울려 놀았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잡아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때 박응서가 공초하기를, “신응망 · 신응기 등은 서양갑과 왕래했을 뿐이고, 비밀히 의논한 일을 반드시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였고, 신응망 · 신응기 형제도 잡혀 와서 공초하기를, “대수롭지 않게 시골에서 그를 만나보았을 뿐인데, 그가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하니, 광해군이 명령하기를, “신응망 · 신응기 등을 방면하도록 하라.” 하여, 신응망 · 신응기 형제는 옥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신응망은 나이가 겨우 19세였는데, 하마터면 무고하게 옥사에 연루되어 죽을 뻔하였다. 그의 홀어머니는 두 아들이 붙잡혀 압송되자, 서울로 따라와서 옥바라지를 하면서 형리(刑吏)들에게 두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며불면서 빌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5년 5월 3일 · 5월 13일]

신응망은 홀로된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고 섬겨서, 그는 효자로서 소문이 났다.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필요한 일은 반드시 자가가 직접 하였고, 아무리 비천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만년에 어머니가 아주 고령(高齡)에 이르렀을 때 신응망도 이미 몸이 늙어갔으나, 항상 손수 물고기를 잡고 작은 짐승을 사냥하여 반찬거리로 만들어서 조석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평소 어머니를 모시고 섬기는 데에 조금도 나태한 기색이 없었으므로, 집안의 사람들도 모두 숙연(肅然)하게 이를 받아 들였다.

신응망은 벼슬에서 물러나서 고향 영암에 머물 때 고향집의 가까운 곳 한적한 땅에다 새로 몇 칸의 초가를 지어놓고 많은 책들을 열람하면서 세월을 보냈고, 또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권장하는 ‘오십운(五十韻)’의 글을 지어 후진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였다. 또 소은신천익을 찾아가서 주자학의 깊은 이론을 토론하고, 벼슬길에 나가고 물러나는 유학자의 양식(良識)을 배웠다. 그는 언제나 기력이 넘쳐흘러서 일을 할 때마다 비록 폐단이 있을지라도 과감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그러므로 일을 적당한 때에 맞추어 처리하지 못하고 사람을 적당한 자리에서 대접하지 못하여, 그를 아는 자들은 모두 그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잘 모르는 자들은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소은유고』 권1 「신응망 묘갈명」] 신응망은 문학과 행정 실무에 모두 능하였으나, 지나친 술이 건강과 출세를 가로막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영암군(靈巖郡) 북쪽 진량리(陳良里) 수남산(水南山)의 선영에 있는데, 소은(素隱)신천익(愼天翊)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소은유고(素隱遺稿)』 권1 「신응망 묘갈명(辛應望墓碣銘)」] 첫째 부인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김곤(金滾)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낳았다. 둘째 부인 영광 정씨(靈光丁氏)는 정명달(丁名達)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신익진(辛翊震)이고, 차남은 신소달(辛小達)이다. 부안 김씨는 신응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서 영암군 북쪽 불갑(佛甲) 삼각(三角)의 밑에 묻었다. 또 두 아들이 먼저 죽자, 신응망이 일찍이 말하기를, “큰 아들 익진이 묻힌 곳에 나를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전 부인 김씨가 기다리고 있는 무덤 곁에 묻혔다. [『소은유고』 권1 「신응망 묘갈명」]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소은유고(素隱遺稿)』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택당집(澤堂集)』
  • 『지천집(遲川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