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처검(宋處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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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9년(세조 5)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 등을 지냈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송구(宋俱)이며, 할아버지는 송신의(宋臣義)이다. 형은 성종(成宗) 대에 이조 참의(參議)를 지낸 송처관(宋處寬)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4년(세종 16)에 알성시(謁聖試)에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文科榜目)』] 이후 집현전(集賢殿)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집현전 수찬(修撰) 등을 역임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당시 집현전 관원으로 활동하던 최만리(崔萬理), 정창손(鄭昌孫), 양성지(梁誠之) 등과 주로 뜻을 같이 했다. 1443년(세종 25)에는 전제개혁 논의에 참여해 연분 9등법에 반대했으며, 1444년(세종 26)에는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 상소에 동조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다.(『세종실록』 25년 10월 27일),(『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이후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文宗)이 왕위에 오른 후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으로 임명되어, 대간으로서 관리의 비리를 적발해 탄핵하는 활동을 했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30일) 당시 사간원에는 역대 사간원 관원의 인사임명을 벽상(壁上)에 기록한 제명기(題名記)가 있었는데, 송처검(宋處儉)이 동료 관원과 의논해 이를 보수하고 정리했다.[『사가집(四佳集)』「사간원제명기(司諫院題名記)」],[『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도(京都)」 권하] 이외에도 충순위(忠順衛)를 혁파해 선비의 습속을 진작시킬 것을 주장하거나, 외임에 임명된 자가 대신에게 아부해 내직으로 복귀하는 일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문종실록』 즉위년 12월 23일),(『문종실록』 1년 2월 29일)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당으로 지목되어 의금부(義禁府) 가정낭관(加定郞官)으로 강등되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11일) 하지만 세조 즉위 이후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 2등에 봉해지고, 성균관 대사성, 중추원 첨지사 등을 역임했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세조실록』 5년 4월 2일),(『세조실록』 5년 7월 3일) 1459년(세조 5)에는 명(明)나라 사신인 왕월(王軏)이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병이 나자, 세조가 내의(內醫)와 함께 송처검을 직접 파견하기도 했다.(『세조실록』 5년 4월 2일)

같은 해 8월 송처검은 통신사(通信使)의 정사(正使)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때 부사(副使)는 행 호군(行護軍)이종실(李從實)이, 서장관(書狀官)에는 종부시(宗簿寺) 주부(注簿)이근(李覲)이 임명되었다.(『세조실록』 5년 8월 23일) 하지만 10월에 통신사 선단이 대마도 부근 해역에서 풍랑을 만났고, 그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다.(『세조실록』 6년 1월 3일)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460년(세조 6) 7월까지 사고 인근 해안을 수색하고 송처검의 집안에 쌀을 내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결국 송처검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세조실록』 6년 1월 5일),(『세조실록』 6년 1월 7일) 조정에서는 비록 왕명을 끝까지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생사여부가 불분명하고 바닷길에서 극심하게 고생한 것을 헤아려 송처검의 관직을 추탈하지 않았다. 또한 후에 송처검 집안에서 장례를 치룰 때 전물(奠物)을 보내기도 했다.(『세조실록』 6년 4월 13일),(『세조실록』 6년 7월 6일)

성품과 일화

송처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 대 집현전 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서거정(徐居正)은 송처검이 통신사로 떠날 때의 아쉬움을 시로 남겼다.[『사가집(四佳集)』 권4 「송송첨추봉사일본(送宋僉樞奉使日本)」] 또 형 송처관과 서거정 등이 안평대군과 친분이 있었고,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의 무리로 지목된 점 등으로 볼 때, 안평대군과도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송처검은 주로 통신사 파견의 위험성을 논하는 근거 사례로 자주 언급되었다.[『해사일기(海槎日記)』 권5]

묘소와 후손

송처검의 후손과 묘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최소 1녀가 있었는데, 행 부사정(行副司正)김익수(金益壽)와 결혼했다.(『세조실록』 6년 7월 6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가집(四佳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해사일기(海槎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