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宋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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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7년(중종12)∼1584년(선조17) = 68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척신(戚臣). 자는 명중(明仲), 자호는 이암(頤庵)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주거지는 서울 수진방(壽進坊)이다. 아버지는 여량군(礪良君)송지한(宋之翰)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영의정남곤(南袞)의 딸이다. 영의정송질(宋軼)의 손자인데, 중종의 부마가 되어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중종∼선조 시대 부마로서 활동

1526년(중종21) 나이 겨우 10세 때 부마로 뽑혀서 중종(中宗)과 숙원이씨(淑媛李氏)의 딸인 정순옹주(貞順翁主)에게 장가들고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다. 1542년(중종37) 중종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서 종친(宗親)의빈(儀賓)에게 시제(詩題)를 내어 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가 응제시(應製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자, 가자(加資)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하였다. 또 중종의 사랑을 받아 젊은 나이에 자품(資品)이 승진되어 정경(正卿)의 반열에 올랐다. 1546년(명종1) 사옹원(司饔院)제조(提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황제의 조사(詔使)를 대접하는 일을 맡아서 잘 수행하였다. 이에, 명종이 특별히 승품(陞品)시키고 조부의 봉작(封爵)을 그대로 이어 여성군(礪城君)에 봉했다. 그 뒤에 명종의 총애를 받아서 마침내 의빈부(儀賓府)충훈부(忠勳府) 양부의 책임을 맡았고 상의원(尙衣院)정(正)을 겸임하여 궁중의 의례와 법도를 관리하였다. 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으로서 금려(禁旅)를 총괄하여 궁전의 호위를 책임진 것이 여러 차례였다. 또 그는 문장에 뛰어나고 예절에 밝았으므로 명나라 조사가 올 적에는 영위사(迎慰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안주(安州)와 황주(黃州) 등지에서 영접하였다. 선조는 종친과 의빈의 종백(宗伯)으로 존경하여 많은 자문을 하였다. 1584년(선조17) 7월 13일 서울의 중부 수진방(壽進坊) 사저(私邸)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8세였다. 기일이 생일과 같은 날이다.

저서로는 『이암유고(頤庵遺稿)』 12권 4책이 있다.

시문과 예학

송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예학(禮學)에 정통하여 명유 퇴계(退溪)이황(李滉)과 율곡(栗谷)이이(李珥) 등과 자주 강론하고 질정(質正)하였다. 또 시문(詩文)을 짓는 데 번거롭게 산삭(刪削)하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에 부합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예절에 밝았으므로, 대신 노수신(盧守愼) 등이 송인에게 종백이나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다고 주장하고, 명나라 조사가 올 적마다 그를 영위사로 삼도록 추천하였는데, 그때부터 의빈 중에서 문장이 뛰어난 사람도 영위사에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장에 능숙하고 예학에 일가견을 이루어 사류(士類)의 인정을 받아서, 당대의 석학인 이황 · 조식(曺植) · 이민구(李敏求) · 정렴(鄭*) · 이이 · 성혼(成渾) 등과 널리 교유하였다.

송인이 예학에 밝았다는 것은, 『사계전서(沙溪全書)』에 보이는 그의 제사에 대한 견해에서 알 수 있다. 송인은 제사의 종류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시제(時祭)는 증조까지만 지내고, 고조는 묘제(墓祭)와 기제(忌祭)만 지내며, 5대조는 한식(寒食)과 추석(秋夕)에 묘제만을 지내고, 6대조의 묘제는 단지 한식에만 지내야 한다.” 하였다.(『사계전서』 권25) 또 제사지낼 때 축문(祝文)을 불에 태우는 것을 반대하기를, “신령이 이제 막 신주에 의귀(依歸)하였으나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불로 축문을 태울 경우에 혹시 혼령이 놀라서 흩어질까 봐 염려된다.” 하고, 축문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계전서』 권42)

그림과 글씨

송인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명종 때 퇴계이황이 은퇴하여 안동 도산(陶山)의 퇴계(退溪) 물가에다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이황이 그 골짜기가 그윽하고 숲이 짙으며, 물이 맑고 돌이 조촐한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명종이 그 소식을 듣고, 송인을 시켜서 도산서원을 찾아가 그곳의 경치를 그리게 하고(『퇴계집(退溪集)』 권6), 이황의 「도산기(陶山記)」를 적어서 병풍과 족자를 만들어 바치도록 하여, 항상 침전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5) 이를 보더라고 그가 그림에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글씨도 유명하였는데, 특히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필법을 본받아 해서(楷書)를 잘 써서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 그래서 산릉(山陵)의 지문(誌文)과 궁전(宮殿)의 편액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공사간의 금석문(金石文)을 모두 그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의 글씨로는 미수(眉叟)허목(許穆)이 극찬한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비롯하여, 아버지 송지한(宋之翰)의 묘갈(墓碣), 양주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신도비(神道碑), 남양의 홍언필(洪彦弼) 비(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沈光彦) 비(碑), 여주의 김공석(金公奭) 묘갈(墓碣), 부안의 김석옥(金錫沃) 묘비(墓碑) 등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송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명민하고, 풍채가 빼어났다. 평소에 몸가짐은 편안하고 중후하며, 행동거지는 법도에 맞았다. 가정에 있을 때에는 말소리와 용모가 온화하고 부드러워 마치 어린아이 같았으나, 상례(喪禮)를 집행할 적에는 법도에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여 거의 상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지경이었다. 평소에 착용하는 조그마한 물건까지도 중화(中華) 제도를 좋아하고 따랐으므로, 의복과 생활 도구가 화려하여 관대(冠帶)를 착용하고 문밖을 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지팡이 집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탐방하기를 즐겨서 사방의 명승지를 다 둘러보았다. 한강 가에 정자를 세워 놓고 가요계[琴歌]에 이름을 올리고 소인(騷人)과 묵객(墨客)을 초청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고기잡이와 낚시로써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소라산(蘇羅山)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증손자 송희업(宋熙業)의 부탁으로 낙전당(樂全堂)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낙전당집(樂全堂集)』 권12) 부인 정순옹주는 중종의 제3녀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아들 송유의(宋惟毅)는 돈녕부 봉사(奉事)를 지냈고, 손자 송기(宋圻)는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첨지사를 지냈으며 증손자 송희업은 형조 정랑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이암유고(頤庵遺稿)』
  • 『낙전당집(樂全堂集)』
  • 『택당집(澤堂集)』
  • 『계곡집(谿谷集)』
  • 『고봉집(高峯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계만록(松溪漫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퇴계집(退溪集)』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