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徐景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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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9년(선조12)∼1643년(인조21) = 65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의빈(儀賓). 선조의 부마.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강(松岡)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서성(徐渻)이고,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목사(牧使)송영(宋寧)의 딸이다. 우의정서경우(徐景雨)의 동생이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사돈 관계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1년(선조24) 나이 13세 때 의빈에 선발되어 선조의 맏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약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환도한 뒤에 호성 원종 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종2품상 자의대부(資義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1596년(선조29) 18세 때 혼례를 올리고,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졌다. 1597년(선조30) 왜군과 싸우기 위하여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이 남교(南郊)에서 회맹(會盟)할 때 의빈의 대표로서 이에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정신옹주는 어머니 인빈김씨(仁嬪金氏)를 따라서 서도(西道)로 피난가고, 그는 남아 대궐 안에서 장인 선조를 모셨다. 그 뒤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총관(摠管)상의원(尙衣院)제조(提調)도 겸임하였다. 그때 종묘(宗廟)의 악기(樂器)가 갖추어지지 않아 전담 기구를 만들어 정비(整備)하였는데, 그가 제조가 되어 악기를 갖추었으며, 또 선원록(璿源錄)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하여 이를 감수하였다. 일이 끝나자, 정2품하 통헌대부(通憲大夫)에서 정2품상 봉헌대부(奉憲大夫)로 승품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과 처남매부 사이로서 행동에 조심을 하였다. 1613년(광해군5) 북인(北人)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의 외조부 김제남이 죽음을 당할 때 그의 맏사위 김규(金珪)도 화를 입었는데, 김제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 서성도 선조가 영창대군을 부탁한 ‘7신(臣)’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 1616년(광해군8) 북인 정권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고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키자, 그는 의빈의 대표로서 반대할 수가 없어서, “의빈들은 감히 의견을 말씀드릴 수 없으니 오직 조정에서 잘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북인 정권의 강압에 못 이겨 1618년(광해군10) 우의정한효순(韓孝純)과 달성위 서경주는 백관과 종친들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하여 폐모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그는 모친상 중에 있었는데, 아버지 서성이 복직되었다. 이듬해 인조가 달성위 서경주를 기복(起伏)하도록 명하였으나, 서경주는 상소하여 상례를 끝마치겠다고 고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담제(禫祭) 중에 있었지만 인조를 호종하였다. 반란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종1품하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품되었다. 상례를 끝마치고 금화도감(禁火都監) · 내자시(內資寺) 제조를 겸임하였다. 1625년(인조3) 종1품하 숭덕대부 달성위로 승품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서 온 가족이 강화도로 피난갔으나, 정신옹주가 피난생활을 힘들어하였으므로, 얼마 안 되어 임금의 허락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국가와 존망을 같이해야 할 근신(近臣)과 거실(巨室)의 행위가 아니라 하며 사헌부가 서경주의 삭탈관직을 청하자 인조가 그를 파직하였다. 1631년(인조9)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치르고,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1636년(인조14)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장자)이 탄생하자, 인조가 산실청(産室廳)권초관(捲草官)이었던 서경주에게 숙마 1필을 내려주었다. 그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재상들과 함께 가족들을 거느리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싸우던 인조를 호종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녹봉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만년에는 상의원(尙衣院) · 관상감(觀象監)의 제조를 겸임하였고, 또 오위도총부 총관을 역임하였다. 1643년(인조21) 9월 29일 오랜 숙환으로 죽으니, 춘추가 65세였다.

성품

서경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풍만하고 성질은 장중(莊重)하였다. 행동을 예절에 맞도록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법도에 맞았다. 부모 곁에 있을 때에는 항상 덕용(德容)과 화기(和氣)가 있어서 말을 하거나 침묵하거나 하여 즐거움을 주었다. 심지어 음식을 봉양하거나 온정(溫凊)의 물건을 받들 때에서도 지극한 효성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형들과 우애가 두터워 언제나 만나면 종일토록 희희낙락하게 즐거워하였으며, 형들의 집에 혹시라도 없는 물건이 있으면 그는 즉시 이것을 구하여 주었다. 어려서부터 서사(書史)를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말이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에 미치면 언론(言論)이 당당하여 말씨에 구차한 기색이 없었다. 자손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예법(禮法)을 근본으로 삼고 관혼상제(冠婚喪祭)는 반드시 고례(古禮)에 따랐으므로, 집안의 질서가 잡혀서 저절로 하나의 가법(家法)을 이루었다.

일화

<이괄의 반란> 때 관향사남이웅(南以雄)이 군량미가 모자라서 정신옹주의 봉산(鳳山) 농장의 곡식 2백여 석을 가져다 썼다. 반란이 평정되자, 1624년(인조2) 정신옹주가 이 사실을 정문(呈文)했는데, 호조의 청으로 인조가 그 곡식 값을 대신하여 적몰한 역적의 집을 내려주었다. 이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정신옹주와 서경주가 나라의 일이 위급한 때를 생각하지 않고 군수물자로 징발되어 쓰인 곡식을, 장사꾼이 물건 값을 따지듯이 갚아 달라 한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온양(溫陽) 남쪽 궁평향(宮坪鄕) 광덕산(廣德山) 북쪽 기슭의 묘원에 있는데, 그의 장조카 서원리(徐元履)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정신옹주는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 태어난 맏딸로, 그보다 10년 뒤에 죽어서 그의 무덤 왼쪽에 묻혔다. 자녀는 3남 5녀를 두었는데, 장자 서정리(徐貞履)는 부사(府使)를 지내고, 차자 서정리(徐正履)는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맏사위 김규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의 아들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대동야승(大東野乘)』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청음집(淸陰集)』
  • 『퇴계집(退溪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