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초관(捲草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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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 고유의 출산 의례인 권초제(捲草祭)를 주관한 임시 관원.

개설

왕실에서 자녀가 태어나면 7일째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례인 권초제를 행하였는데, 권초관은 이때 헌관(獻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소격전에서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를 행하였기 때문에 개복신초헌관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례 형식이 변하여 권초제를 지냈으므로 권초관이라 칭하였다. 권초관은 정2품 이상의 관원 가운데 다복하고 아들이 많은 사람을 선정하였다. 권초관은 짚자리[草席]를 담은 권초함과 함께, 특별히 준비한 쌀, 실타래, 돈 등을 산실 앞에 차려 놓고 향을 사르고 재배(再拜)하였다. 권초관이 주관하는 권초제는 왕실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뿐 아니라, 왕실의 출산이 안전하게 끝났음을 알리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담당 직무

권초관은 왕실에서 자녀가 태어난 지 7일째 되는 날 행하는 권초제의 헌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권초관은 왕비의 출산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 관청인 산실청이 조직될 때 함께 임명되었는데, 정2품 이상의 관원 가운데서 특별히 다복하고 아들이 많은 사람이 선정되었다. 권초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고민하는 영조의 모습을 보면 권초관을 선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28년 7월 28일).

왕실 여성이 자녀를 출산하면 그 직후에 의녀가 산실에 깔아 두었던 산자리를 산실 밖으로 가지고 나와 담당 의관에게 전한다. 의관은 이를 받아다가 미리 정해 둔 현초문(懸草門)에 7일 동안 매달아 둔다. 7일째 되는 날 산자리를 걷어서 권초관에게 주면 권초관은 이를 정성스럽게 말아서, 즉 권초(捲草)하여 미리 준비한 함 속에 넣은 뒤 권초제를 지낸다.

권초제의 제상에는 제사 음식을 올리는 대신 권초함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담은 물건들을 진열한다. 이때 진열되는 물건들의 명칭은 명미(命米), 명사(命絲), 명주(命紬), 명정은(命正銀)이라고 하였다. 쌀, 옷감, 돈, 실타래 등에 ‘목숨 명(命)’ 자를 붙여 왕실 자녀가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기를 기원한 것이다. 권초관이 제상 앞에서 새로 태어난 왕실 자녀의 무병장수를 비는 것이 권초제의 핵심이다.

권초제를 마치고 나면 산실청은 해체되고, 왕은 수고한 산실청 관원들에게 각자 역할을 따라 포상을 하였다. 이때 권초관은 대개 본인이 가자(加資)되거나 자손이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누렸으며, 특별한 경우 숙마 1필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다.

변천

왕실 자녀의 복을 구하는 의례는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소격전에서 행하는 개복신초례가 새로 태어난 왕실 자녀의 복을 구하는 중요한 의례였다. 따라서 개복신초례의 헌관이 소격전에서 사흘 동안 도교의 신들에게 왕실 자녀의 무병장수를 비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도교 의례가 사라지고, 새로운 형식을 갖춘 권초제로 변화되었다. 권초제에서도 개복신초례와 마찬가지로 헌관을 임명하였는데, 그를 권초관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왕실 권초례에 나타난 의례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권초제라는 의례용어의 등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98년(선조 31)에 선조의 원손이 탄생했을 떄, ‘권초치제(捲草致祭)’나 ‘헌관(獻官)’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권초제와 권초관이라는 용어는 선조 이후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조선왕조실록』에서 권초관이라는 관직명은 1636년(인조 14)에 처음으로 등장한다(『인조실록』 14년 4월 2일). 그러나 『승정원일기』에는 이보다 앞서 1626년(인조 4)에 ‘권초헌관’라는 기록이 보이고, 그 후 1631년(인조 9) ‘권초관’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인조대에 권초관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으로 보아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왕실의 권초례에 나타난 변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권초관은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그 후손들 가운데서 선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50대 이상으로, 슬하에 아들이 많은 사람이 주로 선정되었다. 예를 들어 1636년(인조 14) 원손, 즉 소현 세자의 맏아들 경선군(慶善君)이 태어났을 때 권초관을 맡은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사위로, 정신옹주(貞愼翁主)와의 사이에 3남 5녀를 두었다. 1750년(영조 26)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권초관을 맡은 원경하(元景夏)는 효종의 사위 원몽린(元夢麟)의 손자로, 그의 할머니가 효종의 6녀인 숙경공주(淑敬公主)이다. 원경하는 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자녀로 두었다.

왕비가 출산할 경우 2품 이상의 고관을 권초관으로 따로 임명하였으나, 후궁의 경우에는 출산을 담당한 산실 의관이 권초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왕실 자녀가 귀해지면서 후궁이 출산할 때도 권초관을 따로 임명하는 사례가 종종 생겨났다.

참고문헌

  • 『承政院日記』
  • 『産室廳總規』
  • 『大君公主御誕生의 制』
  • 김지영, 「조선왕실의 출산문화 연구: 역사인류학적 접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 김지영, 「조선시대 왕실 ‘권초례(捲草禮)의 변화」, 『민속학연구』제30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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