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詳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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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死罪) 등 중죄를 상세히 복심(覆審)하는 일.

개설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 단옥(斷獄)의 ‘사수복주대보(死囚覆奏待報)’조에는 사형수를 보고하여 회보를 기다리는 법이 마련되어 있다. 무릇 사형수를 거듭 보고하여 회보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결한 경우에는 장(杖) 80에 처하며, 이미 보고하여 회보를 받아 결정된 경우에는 3일이 지나 집행하도록 하였다. 기한이 되지 않았는데 집행하거나 기한이 지났는데도 집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각각 장 60에 처하였고 입춘 이후, 추분 이전에 사형을 집행한 경우에는 장 80에 처하였으며 10악(十惡)의 죄를 범하여 응당 사형될 경우나 강도의 경우에는 비록 부대시(不待時)로 결정되더라도 금형일(禁刑日)에 집행한 경우에는 태(笞) 40에 처하도록 했다.

조선의 경우 법률, 사건 심리, 소송, 노비에 관한 정무를 관장하는 형조(刑曹)에는 상복사(詳覆司)·고율사(考律司)·장금사(掌禁司)·장례사(掌隸司) 등 4개의 속사(屬司)가 있었는데 이 중 상복사에서 사죄(死罪)를 자세히 복심(覆審)하는 일을 맡았다. 고율사는 율령(律令)을 살피고 조사하는 일을 맡았고, 장금사는 형벌과 치옥(治獄), 금령(禁令)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장례사는 노비의 장부와 포로(捕虜)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1430년(세종 12) 형조에 정랑(正郞)좌랑(佐郞)을 한 사람씩 더 설치하였으므로 상복사의 칭호를 고율사의 위에 두게 하자는 이조의 보고에 따라 속사의 위차(位次)가 정해졌다. 1437년(세종 19) 12월 형조의 계(啓)에 따라 상복사 등 4개의 사(司)에 각각 1방(房)과 2방을 두도록 하였는데 상복사는 상일방(詳一房)·상이방(詳二房)으로 나누어 서울과 지방의 중죄(重罪)에 대한 복심(覆審)을 분담하였다.

1방(房)은 판서(判書)가 담당하고, 2방은 낭청(郎廳)이 외도(外道)의 상복과 의정부·중추부(中樞府)·사옹원·사복시·선공감·중학(中學)의 남부(南部)와 북부(北部), 현릉(顯陵)·희릉(禧陵)·효릉(孝陵)·함경도의 분장 사무를 겸했다. 2방의 좌랑(佐郞) 1원(員)은 경내(京內)의 상복을 관리하고 종친부·도총부(都摠府)·예문관·전의감·혜민서·의영고·남학(南學)·호위청(扈衛廳)·실록청(實錄廳)·국장도감(國葬都監)·목릉(穆陵)·숭릉(崇陵)·개성부·강화부·수원부·광주부·경기도를 담당했다.

상복사는 검시(檢屍)에 대한 사무도 관장하였다. 5부(部)에서 초검(初檢)한 뒤에 검시장(檢屍狀)을 형조에 보고하고, 또 한성부가 복검(復檢)하여 그 장(狀)을 형조에 옮기면, 상복사에서 초검(初檢)·복검장(復檢狀) 안의 같고 다른 것을 전장(專掌)하여 상고해서 시행하도록 했다.

내용 및 변천

서울과 지방의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수에 대해서는 형조(刑曹)상복사(詳覆司)에서 자세히 살펴서 의정부(議政府)에 전보(轉報)하면 의정부에서 의의(擬議)한 뒤에 계문(啓聞)하여 상복하도록 했다. 의금부(義禁府)의 사죄 사건은 왕명(王命)에 의한 옥사이므로 의정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수에 대해서는 세 번 심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사죄삼복계(死罪三覆啓)를 시행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그 고을의 수령과 함께 추문(推問)하게 하였으며 또 차사(差使) 2인을 정하여 재차 조사 심리[考覆]하게 하고 또 직접 심문하여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제주(濟州)의 제주목(濟州牧)·대정현(大靜縣)·정의현(旌義縣) 등 세 고을에서는 절제사(節制使)가 직접 심문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해서 임금에게 아뢰도록 했다.

세종은 특히 인명에 관련된 옥사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함을 거듭 강조했다. 형벌과 옥사(獄事)는 인명에 관계되는 것인데, 형조에서는 잡송(雜訟)이 번거로우므로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자세히 복심(覆審)할 겨를이 없어서, 죄를 결단한 것이 가끔 적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염려했다. 그래서 상복사 낭청(郞廳)을 더 설치하고, 지방에는 여러번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보내서 반복해서 추문(推問)하여 힘써 실정을 밝히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죄수들이 쉽게 자복(自服)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옥사(獄辭)가 빨리 이루어지는 것도 요구하지 말며 여러 방면으로 힐문(詰問)하고 반복하여 추구(推究)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서울이나 지방 관리들은 모든 사형수의 경우 각 도 감사(監司)가 본조에 이문(移文)하여 본조에서 마감하도록 하고, 만약 다시 추궁할 일이 있으면 즉시 이문(移文)하도록 하게 하면서 공문을 보낼 때에 협판(挾板)으로 전송(傳送)하면 혹 늦어지기도 하므로 공사(公事)로 역마를 타는 자에게 부탁하여 전해 보내서 지체하지 말게 하여 형벌을 조심하는 뜻에 부응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처럼 세종은 상복이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거듭 강조했다.

이후 인명에 관련된 옥사에 있어서 상복의 절차는 정착되어 갔다. 모든 옥사가 다 형조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상복사(詳覆司) 낭청(郞廳)이 이를 상고하여 의심할 만한 수인(囚人)이 있으면 당상(堂上)과 함께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하여, 연유(緣由)를 갖추어 하교(下敎)를 받아 처리하는 방식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1471년(성종 2)에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상복하는 일은 전례(前例)에 의하여 의정부에서 다시 평의(評議)하게 하였다. 1472년(성종 3)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김이정(金利貞)이 문제 삼은 바, 모든 사형수는 형조에서 상복(詳覆)하여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마감(磨勘)한 뒤에 형조로 돌려서 아뢰는 것인데, 근래 또 경연관(經筵官)선전관(宣傳官) 등에게 명하여 다시 고검(考檢)하게 한 일에 대해 물어보자 성종은 혹 미진(未盡)한 고검(考檢)이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복심(覆審)하게 한 것일 뿐 이는 상례(常例)가 아니라고 상복 절차에 대해 재차 확인했다.

물론 삼복이 시행 상에 있어서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즉 옥사를 미루고 유체(留滯)하여 혹 3년 또는 5년이 되도록 처리하지 않으며 형식적으로 문안(文案)으로만 검핵하는 일도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또 간혹 죄질이 위중할 경우는 삼복을 다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471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김종순(金從舜)의 치계(馳啓)로, 백주(白晝)에 공략 겁탈하여 사람의 재물을 빼앗고 새벽에 방화(放火)하여 인축(人畜)을 다 불사른 자 같은 경우 정황이 명백한데도 계문(啓聞)하고 해사(該司)에 내려 상복하게 하면 그 사이 여러 해를 경과하는 동안 옥졸(獄卒)에게 뇌물을 주어 도망하거나 병으로 인하여 죽거나 하여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한다는 사정을 계문하였다. 그리고 남의 자녀(子女)를 살인하고 사람의 여사(廬舍)를 불사르며, 관병(官兵)에 항거하여 대적하는 등 반역(反逆)과 다름없는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속히 형을 집행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형조의 보고에 따라, 사수(死囚)를 삼복(三覆)하여 처결하는 것은 『대전(大典)』에 기재되었으니, 한때의 폐단을 가지고 경솔히 개정하는 것을 불가하지만 모질고 독살스러운 자들이 반역이나 다름없는 죄를 짓고 관찰사가 추고(推考)하여 계문한 뒤에, 형조에서 장물의 증거가 명백한 것을 변핵(辨覈)한 경우 임시로 취지(取旨)하여 삼복(三覆)을 기다리지 말고 시행하도록 했다.

1490년(성종 21)에도 같은 논의가 있었는데 관병(官兵)에 대항한 자에 대해 죄악이 이미 드러났고, 같은 무리를 이미 본도(本道)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반드시 삼복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대해 죄가 비록 죽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삼복의 법은 폐지할 수 없으며 만약 이와 같이 하면 뒤에 반드시 전례를 끌어대어 법을 어지럽게 할 것이니, 삼복한 뒤에 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에 성종은 죄인의 죄질이 악독하므로 상복하지 말고 형벌을 집행하도록 했다. 모반(謀叛) 등의 죄일 경우에도 종종 상복을 거치지 않고 행형(行刑)하도록 하나 이럴 경우 삼공(三公) 등이 상복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며 경솔하게 처리하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이처럼 죄질이 특히 나쁜 경우는 상복하지 않고 형벌을 집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행형(行刑)에 있어서 죄수를 거듭 심리하는 상복은 조선시대 행형(行刑)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특히 사형수에 대한 상복의 경우는 반드시 삼복을 하도록 되어 있다. 1421년(세종 3) 사죄삼복계(死罪三覆啓)는 인명을 중시하고 착오를 막자는 것이므로 형조에서는 2복·3복할 때 원 재판 문건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의정(議定)한 후에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형조에 지시했다.

해마다 12월에 사형을 결단하는데, 3개월 전에 상복을 행하며 반드시 삼복(三覆)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상복과 삼복(三覆)은 사수(死囚)에 대한 심리 방식이라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내용은 엄밀하게 구분될 수 있다. 상복은 형조의 공사(公事)에 의하여 의정부에 보고하고 자세히 심리하여 조계(朝啓)에서 처결하는 것이고, 삼복은 사형수가 지만취초(遲晩取招)하면 이를 임금에게 입계하여 윤허받는 것이 초복(初覆)이고, 그 사람의 죄상을 초복에 의하여 처결하고 윤허하는 전교를 받드는 것이 재복(再覆)이며, 그 사람의 죄상을 재복에 의하여 처결하고 윤허하는 전교를 받드는 것이 삼복이라 하겠다.

정조 때 부대시(不待時)의 사수들에게도 상복을 하도록 하였다. 대역부도(大逆不道)와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죄인들은 대신이 국문하는 자리에 임석(臨席)하여 삼사(三司)에서 옥사를 안핵(按覈)하므로 이는 상복하는 뜻이 있는 것이지만 부대시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정조는 부대시의 죄수의 경우, 대신과 삼사에서 죄를 조사하여 실정을 밝힐 수 없고, 그 일은 단지 율관(律官)의 견해로 율문(律文)을 써서 옥안(獄案)을 얽어 옥관(獄官)에게 올리면 옥관은 이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관위(官位)를 상고하여 쓰고 서압(署押)만 삼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어 대시(待時)의 죄수가 아니더라도 대신들이 언의(讞議)하여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다시 더 상복한 다음 등문(登聞)하도록 하여 부대시의 죄수 역시 신중하게 심리할 것을 지시했다. 사형수에 대한 형벌 적용을 신중하게 하기 위한 휼형(恤刑)의 원칙이 부대시의 죄수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이라 하겠다.

상복(詳覆)은 형조에서 요청하여 의정부에서 심리하는 것이지만 상복할 사건인지의 여부를 사헌부 등에서 결정하기도 했다. 1484년(성종 15) 근력부위(勤力副尉) 장사자(張獅子)는 적모(嫡母) 김씨(金氏)가 노비(奴婢)를 합집(合執)하는 것을 원망하고 빼앗아 가지려고 꾀하여, 실행(失行)했다며 거짓으로 일컬어 익명서(匿名書)를 바쳤는데, 『경국대전』에 "무릇 자손으로서 조부모·부모를 고발한 자는 교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므로 형조를 시켜 상복하여 시행하라고 사헌부에서 아뢰자 그대로 따랐다. 상복의 절차는 형조에서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사헌부, 병조 등 타 관서에서도 상복할 사건을 아뢰기도 했다.

상복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적용했고 호인(胡人) 등의 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또 조선시대 옥사는 사죄라 하더라도 죄인의 자백인 지만취초(遲晩取招)를 받은 결안(結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만취초를 받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상복할 수 없었고 도망 중에 있는 자에 대해서도 역시 상복할 수 없었다.

의의

죄인에게 형률을 적용할 경우 결안을 받고 상복이나 계복(啓覆)에 이른 뒤에야 조율할 수 있었다. 즉 죄를 따져 법률을 적용하는 규정에 있어서는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형률을 거론할 수 있었다. 그만큼 죄인의 죄에 대한 형률 적용이 신중했다는 의미이다. 사형수의 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거듭 심리함으로써 혹시라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고 또 상복을 속히 처리하여 감옥에서 오래 체수되어 있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다.

또 흉년 등의 재해가 있을 때면 특히 각 도에 여러 해 동안 갇혀 있는 사형수의 심리를 속히 결단하고자 했고 그래서 상복할 문안을 속히 올리도록 하였다. 이처럼 사형수를 상복하여 살릴 방법을 찾도록 한 것은 조선시대 국왕이나 의정부, 형조 등의 사법 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던 형벌을 신중히 하는 휼형(恤刑)의 대표적 사례였다. 이는 인명 중시의 태도가 전제가 된 것으로 전근대 유교적 형옥 운영의 원리를 보여주는 제도라 하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추관지(秋官志)』
  • 『은대조례(銀臺條例)』
  • 『육전조례(六典條例)』
  • 이태진 외 4인, 『譯註經國大典』註釋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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