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청(扈衛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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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왕의 호위를 구실로 설치된 군영(軍營).

개설

1623년(광해군 15)에 이귀(李貴)·김유(金瑬) 등 서인(西人) 일파는 광해군 및 집권파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성공시켰다. 그 뒤 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은 왕에 대한 호위가 취약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을 모아 새로운 호위 부대를 조직하고 군영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설치된 군영이 바로 호위청이다. 이로써 반정공신 세력은 병력의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왕을 둘러싸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리력을 갖추게 되었다. 왕과 공신 세력 사이의 관계는 사안에 따라 이해관계가 일치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였는데, 후자의 경우 공신 세력이 왕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호위청을 이용할 소지가 많았다.

호위청은 세대가 바뀌면서 의정(議政)과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지휘권을 장악하여 서인 정권이 유지되는 데 기여하였으며, 뒤에는 노론(老論)의 군사력이라는 속성을 갖게 되었다. 호위청의 재정은 특별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그 지휘부를 중심으로 재원을 마련하여야 했는데, 이것은 호위청이 붕당정치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정치적 사건에 자주 연루되면서 영조와 정조에 의해 호위청의 힘은 약화되어 결국 규모가 축소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호위청의 규모가 더욱 위축되었고, 결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호위청은 1623년(인조 1), 궁궐의 숙위(宿衛)가 취약하므로 이를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에 따라 왕을 호위하는 군대로 설치되었다. 이귀와 김유,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禛) 등 인조반정에 공이 가장 많다고 인정된 훈신(勳臣) 4명이 각각 호위청군관(軍官) 100명씩을 거느렸는데, 이를 ‘호위 4청(廳)’이라 하였다. 또한 뒤이어 4대 공신에 버금가는 공을 인정받은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金自點)이 ‘호위청 당상’이라 하여 군관 50명씩을 지휘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호위청은 총 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연원을 이루어, 세대가 바뀐 뒤에도 호위청 군관의 지휘를 맡은 호위대장(扈衛大將)은 훈신 또는 척신(戚臣)이 담당하였다.

호위청의 군관으로 편성된 사람들은 반정공신이 각기 거느리고 반정에 참여한 그들의 추종 세력이었다. 즉 반정공신의 사병(私兵)에 해당하는 자들이 왕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으로 편성되었으며, 금군은 모두 장교였던 까닭에 군관으로 호칭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호위청의 설치는 겉으로는 왕에 대한 호위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핵심 공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를 반대하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결국 공신 세력의 의도대로 관철되어 호위청이 설립되었다.

조직 및 역할

호위청은 설립 직후에 곧바로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훈신이 담당하는 4명의 호위대장은 군관 140명씩을 거느렸고, 2명이던 당상의 수가 6명으로 늘어나 각기 군관 80명씩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에 따라 총 병력이 1040명에 이르러, 당초보다 2배의 규모가 되었다. 그 가운데 당상이 거느리는 군관은 효종 즉위 이후의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1644년(인조 22)에 일어난 심기원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폐지된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때 호위대장의 청도 4청에서 2청으로 감축되어 호위대장도 4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호위청은 다시 4청으로 복구되었다. 인조 때와 마찬가지로 훈신 또는 척신 가운데 의정 등의 고위 관직을 맡은 인사들이 호위대장이 되었는데, 각기 거느린 부료군관의 수만도 14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호위청 군관으로 새로 편입된 이들 중에는 심양(瀋陽)에서 효종을 보필한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호위청의 성격이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이후 양역(良役)의 변통에 대한 논란이 전개되는 가운데 군영의 폐단에 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됨에 따라 현종 때는 3청으로 줄었다가, 숙종 때 4청으로 회복되고 또다시 3청으로 주는 등 변화를 겪었다.

이 무렵 호위청의 관원으로는 각 청마다 정1품 대장(大將) 1명, 정3품 별장(別將) 3명, 군관(軍官) 350명, 소임군관(所任軍官) 3명, 당상별부료군관(堂上別付料軍官) 1명이 있었다. 각각의 호위대장들이 그들이 거느리는 군관들을 지휘하는 청(廳)을 구성한 점, 군관은 국가에서 급료를 지급받는 ‘부료(付料)’군관과 그렇지 못한 ‘재가대변(在家待變)’군관으로 구분된 점 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부료군관은 호위대장 휘하의 군관은 60명씩, 당상 휘하의 군관은 30명씩으로 규정되었다. 처음에는 매달 쌀 6말을 받았는데, 영조 초엽에는 쌀 7말, 콩 2말, 보리 2말로 늘어났다. 부료군관은 그 정원을 국가가 정하였기 때문에 쉽게 늘어나지 않았으나, 재가대변군관은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고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호위청의 대장 중 1명은 국구가 맡는 것이 관행으로 정착되었고, 2명은 훈신이나 척신인 의정이 겸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3명, 서원(書員) 1명, 대청직(大廳直) 1명, 사령(使令) 5명, 내청군사(內廳軍士) 4명, 도방자(都房子) 3명 등이 있었다.

이후 1682년(숙종 8)에 금위영이 신설되어 왕의 호위 병력이 증강되자 호위청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정해진 절목에 따르면, 호위청의 군관은 3청에서 각각 10명씩 총 30명이 궁궐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군관이 숙직하는 곳에는 심부름할 군사 2명씩을 배정하였으며, 근무에 필요한 종이와 붓, 먹 등은 호조에서 공급하였다. 또 이들의 입직소(入直所)는 인정전 문밖 월랑(月廊)에 두도록 정하였는데 매일 별장 1명, 영장(領將) 3명, 군관 27명이 돌아가며 입직하였다. 호위청 군관은 이러한 궁궐 숙위(宿衛) 외에,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면 어가를 따르며 호위하였다. 19세기 초엽의 경우 평시에는 35명이 궁궐 안에서 숙위하다가,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는 인원을 15명을 늘려 50명이 호위하였다. 왕이 도성 안을 행차할 때는 60명이 뒤따르며 호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한편 호위청 군관들은 때때로 다른 군영의 군사훈련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변천

숙종이 즉위한 뒤 호위청은 호위 병력을 강화하려는 숙종의 방침에 따라 다시 증강되는 양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군관의 수는 별로 증원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685년(숙종 11)에 호위청에 순령수(巡令手)·기수(旗手)·군뢰(軍牢)·등롱군(燈籠軍)·표하군(標下軍)·사후군(伺候軍)·장막군(帳幕軍) 등 400명을 두게 되면서 중앙 군영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호위청 군관 1281명과 군졸 434명 등 1700여 명이 궁궐을 굳게 지켰다는 이유로 상을 받았는데, 이때의 병력 구성을 살펴보면 군관의 수가 규정보다 131명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777년(정조 1)에 호위청 군관이 침전(寢殿)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조는 3청이던 호위청을 1청 350명으로 대폭 축소하고, 호위청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신설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또한 이후 장용영 설치 뒤에, 호위청은 장용영에 흡수 통합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뒤 1802년(순조 2)에 장용영이 폐지됨에 따라 호위청은 다시 설치되었고, 이후 김조순(金祖淳)이 30년 동안 홀로 호위대장을 맡는 등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펴는 권력 기반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였다.

19세기 후반에 고종이 즉위한 뒤에는 몇 번의 폐지와 복설을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군제를 개편할 때 영구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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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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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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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종록, 「중앙 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1863 (하)』, 청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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