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裵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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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0년(중종15)~1573년(선조6) = 54세]. 조선 전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학자. 자는 경여(景餘), 호는 낙천(洛川)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현풍(玄風)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배사종(裵嗣宗)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동선(朴東善)의 딸이다. 처음에 남명(南冥)조식(曺植)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 되었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7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는데, 현풍 고을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자 여기서 그칠 수 없다고 말하고 과거 급제를 목표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김해(金海)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조식을 찾아가서 주자학의 이론을 수학하면서, 과거를 위한 공부가 진정한 학문을 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중에 안동(安東)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퇴계이황을 찾아가서 고인(古人)의 지결(旨訣)을 배우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공부하게 되었다. 1552년(명종7) 부친상을 당하자, 염빈(殮殯)과 장례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행하였고, 3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그 뒤에 어머니 박씨(朴氏)의 강권으로 10여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1561년(명종16)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2세였다. 1565년(명종11) 관천(館薦)으로 남부(南部)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경기전(慶基殿) 참봉으로 옮겼고, 얼마 뒤에 경릉(敬陵) 참봉에 임명되었는데,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68년(선조1) 모친상을 당하였고, 3년 동안 상기(喪期)를 마친 다음 빙고(氷庫)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다.

1571년(선조4) 선조가 재능이 없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도태하고 특별히 명유(名儒)를 추천 받아서 임명하라고 명하자, 배신과 조목(趙穆)이 천거되었다. 1572년(선조5) 동몽교관에 임명되어 학도들을 가르쳤는데, 그에게 수학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강소(講所)에 모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터득[自得]하게 하였다. 그리고 쉬운 단계에서 어려운 단계로 순차적으로 학문을 수학하게 하고, 순서를 뛰어넘어 공부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인을 가르친 송익필(宋翼弼)의 교육 방법과 비슷하였다. 또 강소의 좌석 오른쪽에 학생들이 가져야 할 ‘행동 자세 아홉 가지[九容]’와 ‘사고하는 방법 아홉 가지[九思]’를 써 붙이고 학생들로 하여금 항상 이것들을 읽어보고 실천하게 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학문을 하려면 반드시 안팎으로 겸하여 수련을 쌓아야지, 어느 한쪽에만 치우칠 수는 없다.” 하였다. 그는 거처(居處)하는 곳을 반드시 엄숙하게 하고 동작(動作)하는 것도 절도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보고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배우는 바가 많았다. 또 그의 강소에서 배운 사람들은 모두 걷고 행동하는 데에 법도가 있고 말씨도 점잖아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제자임을 알 수 있었다.

1573년(선조6)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이조 판서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허엽(許曄) 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병이 들었으나, 날마다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고 평상시처럼 법도를 잃지 않았다. 그 해 12월 17일 서울에서 죽으니, 나이가 54세였다.

한편, 그의 스승인 조식(曺植)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그의 행적을 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문도(門徒)들 중에서 그가 뽑혀서「남명선생행록(南冥先生行錄)」을 지어 조정에 바쳤다. 문집으로는 『낙천선생문집(洛川先生文集)』 2권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배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었고, 행실에는 반드시 공경함이 있었다. 작은 일이라 하여 해이하지 않았고, 어둡고 외진 곳이라 하여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주역(周易)』을 즐겨 읽으면서, “학문을 하는 방법은 궁리(窮理)와 실천(實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 ‘경재(景齋)’라는 편액(扁額)을 걸어놓고,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사색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 내외간 예절을 지켰고 형제간에 우애하면서 부모를 섬겼다. 시골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시정(時政)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낙동강 상류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낙천 선생(洛川先生)’이라 일컬었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방사(放肆)와 일욕(逸欲)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였는데, 곽준(郭䞭) · 박성(朴惺) 등이 모두 그 제자이다.

배신이 일곱 살 적에 같은 고을에 사는 김열(金挒)에게 가서 글을 배웠다. 처음에 수학할 때 스승 김열과 그 가족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렸는데, 그가 밤낮으로 약을 달여서 간호하여 모두 완쾌하였다. 나중에 김열이 죽을 때에 자식들에게 배신을 자신을 섬기듯 섬길 것을 유언하여 그 자식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또 엄한경(嚴漢卿)에게 글을 배웠는데, 그가 예절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보고 시험해보고자 하여, 그 딸들 중 하나가 자기 댕기를 풀어서 책 사이에 끼워 놓았다. 그가 댕기를 발견하고 엄한경에게 하직하니, 엄한경이 사과하였고 그 딸도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1572년(선조5)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어 학도들을 가르칠 때, 재상 한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고 공부를 하지 않아서 골머리를 앓게 하던 자신의 아들을, 그의 강소(講所)에 취학(就學)시켰다. 불과 몇 달 만에 그 아들이 고분고분 순해지고 그 가르침대로 행동을 조심하니, 그 재상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몸소 독경(篤敬)을 실천하지 않는 분이라면, 어떻게 사람을 이처럼 감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고령(高靈) 봉상(鳳翔)의 남쪽 언덕에 있는데, 죽은 지 90여 년 뒤에 묘표(墓表)가 세워졌고,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현풍(玄風)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손씨(孫氏)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자는 배희(裵暿)이고, 차자는 배위(裵㬙)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낙천선생문집(洛川先生文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여헌집(旅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치재유고(耻齋遺稿)』
  • 『송천유집(松川遺集)』
  • 『송암집(松巖集)』
  • 『동명집(東溟集)』
  • 『완정집(浣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