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수(朴崙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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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53년(영조 29)~1824년(순조 24) = 72세]. 조선 후기 정조~순조 때 활동한 문신. 이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덕여(德汝)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종규(朴宗珪)이고,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교관(敎官)유명원(柳明垣)의 딸이다.

정조 시대 활동

1786년(정조 10) 12월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으로 있을 때 황감제(黃柑製)에서 수석하여 바로 직부전시(直赴殿試)하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그 해 3월 서영보(徐榮輔)·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뽑혔다. 1791년(정조 15)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792년(정조 16) 3월에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793년(정조 17)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1794년(정조 18)에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敎理)·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1월에 경기 광주(廣州)·죽산(竹山)·양성(陽城)에 암행어사(暗行御使)로 나갔다. 1797년(정조 21) 4월에 홍문관 부교리로 있으면서 교리(敎理)심규로(沈奎魯) 등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이명연(李明淵)의 관직에 임명하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가 한 때 강외(江外)로 출송당했으나 곧 다시 등용되었다. 1799년(정조 23)에 부수찬·수찬(修撰)·사간(司諫)을 역임하면서 정치달(鄭致達)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처벌을 주장하는데 참여하였다. 1800년(정조 24) 상의원(尙衣院)정(正)으로 있으면서 세자 책봉에서의 공으로 상을 받았다.

순조 시대 활동

순조 초년에는 관인으로서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 시기에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후원을 기반으로 정권을 오로지 하고 있던 김달순(金達淳)·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僻派)와 정치적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정계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 뒤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로 책봉되어 안동 김씨(安東金氏) 일문을 중심으로 정계가 재편되기 시작하던 1803년(순조 3) 9월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12월경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1804년(순조 4) 5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805년(순조 5) 3월에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가 되었다. 1806년(순조 6) 4월에 아경(亞卿)이 되었다. 1807년(순조 7) 4월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고, 12월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808년(순조 8) 1월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가 되었고, 12월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09년(순조 9)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4월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5월 초순에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5월 중순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1월에 예조 판서가 되고, 8월에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고, 9월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그 해 11월 초순 초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1월 중순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11월 하순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그 해 12월 21일 형조 판서가 되고, 그 해 12월 25일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가 되었다.

1812년(순조 12) 2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813년(순조 13) 1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 1814년(순조 14) 4월에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가 되고, 7월에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고, 8월에 다시 의금부 판사가 되었으며, 9월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815년(순조 15) 2월 이조 판서가 되고, 3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그 해 6월 초순에 이조 판서가 되고 6월 하순에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으며, 9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16년(순조 16) 3월에 병조 판서가 되고, 7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으며, 12월에 또 다시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17년(순조 17) 4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7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12월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다. 1818년(순조 18) 1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10월에 사은사(謝恩使)의 정사(正使)로 부사(副使)조만원(趙萬元)과 서장관(書狀官) 이희조(李羲肇)와 함께 청(淸)나라에 갔다가 그 뒤에 돌아왔다. 1820년(순조 20) 7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고, 8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9월에 세자시강원 빈객(賓客)이 되었으며, 10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21년(순조 21) 2월에 세자시강원 좌빈객(左賓客)이 되고, 3월에 호조 판서가 되었으며, 9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22년(순조 22) 1월에 공조 판서가 되고, 3월에 세자시강원 좌부빈객이 되었다. 그 해 6월에 아들이 많고 다복한 조신(朝臣)이 맡게 되어 있던 권초관(捲草官)으로 선발되어 왕비가 공주를 낳았을 때 권초례(捲草禮)를 주재하였다. 그 해 8월에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1823년(순조 23) 1월에 세자시강원 좌부빈객이 되었으며, 그 뒤 돈녕부 판사가 되었다. 1824년(순조 24) 윤7월 2일 그는 세상을 떠나니, 나이 72세이다. 그는 글씨에 대한 조예를 인정받아 1807년(순조 7) 단경왕후(端敬王后)온릉(溫陵)의 표석(表石)을 세울 때 해서(楷書)를 썼다.

시호와 후손

1827년(순조 27) 윤5월 충헌(忠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부인 대구 서씨(大丘徐氏)는 서명기(徐命琦)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1남은 박제문(朴齊聞)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文科榜目)』
  • 『청선고(淸選考)』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