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僻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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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 이후 군주와 시파의 의리 변통에 맞서 노론 의리 고수를 자처하던 세력.

개설

벽파(僻派)는 영조대 노론 남당(南黨)의 계승자로서, 군주와 그 뜻에 순응하는 시파(時派)에 맞서서 궁벽한 처지에서도 노론 의리를 고수한다고 자처하던 세력이다. 이들은 정조대 후반에는 정조의 의리 변통 시도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대 초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과도하게 토역론(討逆論)을 관철시키다가 왕실과 노론·소론의 반발을 초래하여 급속히 세력을 잃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벽파는 영조가 확립한 신임의리와 임오의리의 통칭인 대의리(大義理)를 정조와 시파의 견제를 받는 궁벽한 처지에서도 고수한다고 자처하던 세력이다. 벽파의 연원은 영조대 중반 노론 남당(南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노론 남당은 신임의리의 연원을 숙종대까지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영조의 제지를 받았던 노론 강경 세력이다. 이들은 누대에 걸친 벼슬살이 가문과 노론 명문 집안으로 구성된 북당(北黨)에 비해 빈한한 한양 남촌(南村) 지역의 사대부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북당을 이끌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기존의 남당 세력에 새로운 외척 김구주가 가세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영조대 후반에 남당은 대홍(大洪) 홍봉한을 반대하는 공홍(攻洪) 곧 살홍론(殺洪論)에 입각하여 정론(正論)을 주도했다. 후일 정조가 되는 세손 역시 사대부를 우대하고 척신을 배제한다는 노선에서 이들을 우대하였다. 남당은 김구주(金龜柱)를 매개로 정순왕후와 연결되어 있었고 세손의 궁료인 홍국영(洪國榮)과도 연합하여 북당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북당의 소홍(小洪) 홍인한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저지하려 했던 책동을 무산시켜 세손 즉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정조의 즉위 의리인 『명의록』 의리의 지지 세력으로 대우 받아 정국을 주도하였다(『정조실록』 1년 2월 21일) (『정조실록』 1년 3월 6일) (『정조실록』 1년 3월 29일). 그러나 정조 4년에 홍국영이 쫓겨난 이후 정조가 의리 주인으로 소론 서명선을 우대하고 노론 북당에 우호적이었던 세력이 이에 협력하자, 이들을 시류에 영합하는 시파라 비판하고 벽파로 자처하며 『명의록』 의리와 영조가 확립한 대의리 고수를 자임했다(『정조실록』 12년 4월 23일).

벽파는 정조와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실제 정조가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하여 ‘정조의 임오의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조의 영조 대의리 수정 작업에서 견지해야 할 원칙론 차원의 반대였을 뿐 끝까지 정조의 새로운 의리 천명에 항거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벽파 역시 군주의 의리 주재를 궁극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신료였다. 뿐만 아니라 의리론 상에서 세손 시절 이래 정조와는 나름대로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교감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벽파의 지도자 김종수(金鍾秀)는 사도세자 처분에 대한 영조의 후회를 드러낸 「금등(金縢)」 문서가 공개된 이후 장헌세자의 존호 추상(追上)에 동의한 바 있었다(『정조실록』 17년 8월 8일) (『정조실록』 18년 12월 8일). 정조 역시 겉으로는 강경하지만 끝내는 자신에게 호응하는 김종수의 의리를 높이 평가한 바 있었다.

정조 19년 이후 정조가 벽파를 대거 등용하는 환국을 단행한 것은 벽파의 의리 변경 의사를 시험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무렵 벽파의 지도자 심환지(沈煥之)가 정조의 수시변역론(隨時變易論)에 호응하며 장헌세자의 전례(典禮) 문제 곧 추왕(追王)도 담당할 수 있다는 전향적 태도를 보이거나[『순조실록』 6년 10월 22일], 벽파의 지주인 정순왕후가 왕실 차원의 화평책(和平策)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조-심환지 어찰’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사정을 극명히 보여 주는 새로운 자료로 평가받았지만, 그 대체적인 방향은 『정조실록』의 후반부 기사에서도 충분히 서술되고 있었다.

변천

정조가 급작스럽게 훙서한 이후에 벽파는 정조에 호응하던 태도를 변경하였다. 벽파는 영조 대의리 고수의 보루이자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와 결탁해 권력을 장악했고, 이를 기반으로 정조의 의리 변경에 적극 동조하던 세력을 정적(政敵) 제거 차원에서 대거 배척하였다. 이 과정까지는 그래도 영조의 대의리 고수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벽파는 정조가 시파의 지도자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이미 정해둔 국혼(國婚)까지 저지하는 무리수를 시도했다[『순조실록』 4년 8월 8일].

이 사태에 이르기까지 벽파는 정조가 구축한 탕평 정치의 인사 원칙과 사회·정치적 성과를 순조 초기 1~2년 사이에 부정하였다. 정조대에 쌓았던 정치 세력 간의 신의 역시 뿌리부터 흔들렸다. 순조가 친정(親政)에 나서자 벽파는 김조순이 이끄는 시파 뿐 아니라 노론 전반의 반발을 사서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에 벽파의 후원자 정순왕후는 재차 수렴청정을 시도하는 무리수를 두다가 시파에게 저지당했고 얼마 후 훙서하였다. 시파에 비해 사회적 기반이 약했던 벽파는 정순왕후의 지원까지 잃자 노론·소론 시파 연합 세력의 반격을 받아 급속히 몰락했다.

참고문헌

  • 『명의록(明義錄)』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 신구문화사, 2009.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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