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건(朴承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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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9년(광해군 1)~1667년(현종 8) = 59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 현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상주목사(尙州牧使)이다. 자는 자이(子以)이고, 호는 성은(星隱)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충청도 덕산(德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통례원(通禮院)봉례(奉禮)박안행(朴安行)이며, 어머니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교위(校尉)조흥무(趙興武)의 딸이다. 이조 판서(判書)박충원(朴忠元)의 증손자이고, 집의(執義)박승휴(朴承休)의 동생이다.

인조 · 효종 시대의 활동

1630년(인조 8) 중형(仲兄) 박승휴(朴承休)와 같이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나이 25세 때에 비로소 벼슬하여 창릉(昌陵)·광릉(光陵)·정릉(靖陵)의 재랑(齋郞)과 평시서(平市署)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에 형과 같이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그의 효도와 우애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그해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그 뒤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이 되었다. 1652년(효종 3) 1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두 번 역임하였는데, 그 사이 해운 판관(海運判官)이 되어 수송하는 역군(役軍)의 폐단을 과감하게 개혁하였다. 1653년(효종 4) 1월 용안현감(龍安縣監)이 되었는데, 현감 시절 어떤 일을 건의하였다가 귀양을 갔다. 그 뒤에 성균관 직강(直講) ·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1659년(효종 10)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 형조 판서허적(許積)을 탄핵하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였다.

현종 시대의 활동

1661년(현종 2) 5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전라도 도사(道事)가 되었다. 1662년(현종 3) 7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63년(현종 4) 3월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었는데, 이때 진하사(進賀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다가 질병에 걸렸는데, 병환이 위독해져서 도중에 실려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사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그 뒤에 사명을 받들고 다시 중국으로 가겠다고매우 간곡하게 간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제용감 정(濟用監正)이 되었다가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는데, 1664년(현종 5) 9월 상주목사로 재직 중에 관곡을 방출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민역(民役)에 충당하였다고 하여 가자(加資)되었다. 그의 나이 59세 되던 해인 1667년(현종8) 4월 2일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승건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순수한 성품을 하늘에서 타고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독실하였다. 6세 때에 이미 생명이 있는 것을 사랑할 줄을 알아 개미를 밟지 않았다. 9세 때에는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자기의 집 담장 안으로 뻗은 이웃집 복숭아나무에서 떨어진 복숭아는 줍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말씀을 존경하고 믿어 조금도 어긴 적이 없었고, 어버이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받아 먹이기도 하였다. 형제들과 하루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으며, 옷을 입을 적에는 형제끼리 반드시 옷을 돌려가면서 입었고, 어느 곳이나 갈 적에는 반드시 따라갔었고, 출타할 적에는 반드시 나란히 나갔다. 어버이가 사용한 것은 비록 더러워도 싫어하지 않았고, 서제(庶弟)를 지성으로 양육하고, 서제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보다 먼저 먹이고 입히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동료를 위해 귀양가면서도 안색이 태연하였고, 저자의 점포를 다스릴 때에는 뇌물을 근절하였다. 작은 고을이나 큰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좋은 명성을 얻으려고 힘쓰지 않았으나 관리가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는 뜻대로 다 말하다가 축출되어도 후회하지 않았고 견책을 당해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는 조용히 자신을 지키면서 날마다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고, 명예의 길이나 중요한 자리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으나 또한 이 때문에 군자(君子)들의 인정을 받았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이 20세가 되었을 때, 여러 친구와 함께 영천의원(榮川醫院: 영주의 의원)에서 공부하면서 박승건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박승건은 『소학(小學)』을 읽고 있었는데, 이황의 동정을 살피다가 “그대도 『소학』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황은 “아니요.”라고 웃으면서 대답하고 읽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였다고 한다. (『퇴계집(退溪集)』 언행록 권2, 『학봉전집(鶴峯全集)』 학봉속집 권5 참조) 이 일화를 통해 퇴계이황이 그를 학문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洲) 동쪽 문한산(文翰山) 동쪽 기슭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사어(司禦)남호학(南好學)의 딸인데, 우의정(右議政)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외손녀이다.(『청음집(淸陰集)』 권26 참조) 자녀는 3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박동주(朴東冑)이고, 차남은 박지주(朴之冑)이고, 3남은 박세주(朴世冑)이다. 장녀는 신명중(申命重)의 처가 되고, 차녀는 오두선(吳斗宣)의 처가 되고, 3녀는 권오(權悟)의 처가 되고, 4녀는 송은석(宋殷錫)의 처가 되고, 5녀는 이중번(李重蕃)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청음집(淸陰集)』
  • 『퇴계집(退溪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야곡집(冶谷集)』
  • 『죽유집(竹牖集)』
  • 『무릉잡고(武陵雜稿)』
  • 『소고집(嘯皐集)』
  • 『백주집(白洲集)』
  • 『강한집(江漢集)』
  • 『성담집(性潭集)』
  • 『입재집(立齋集)』
  • 『춘당집(春塘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