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金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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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7년(선조 10)∼1635년(인조 13) = 59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무신. 황해도병마사(黃海道兵馬使) 등을 지냈고, 은 병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구(子具)이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며, 봉작은 학성군(鶴城君)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김극조(金克祧)이고, 어머니는 천안 전씨(天安全氏)이다. 할아버지는 김사종(金嗣宗)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한성(金漢城)이다. 아버지가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었다고 무고한 한덕수(韓德脩)에게 복수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이괄(李适)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97년(선조 30) 여름 무과(武科)에 급제해 경상도방어사(慶尙道防禦使)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함께 왜적과 싸워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둔원내촌(屯院內村)에서 10여 명을 죽였다. 또 장치(獐峙)에서 혼자 왜적 수십 명의 목을 베어 죽이자, 선혈이 바위에 낭자해서, 후세 사람들이 이 바위를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전라도병사(全羅道兵使)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있을 때, 기축옥사 당시 아버지를 무고해 죽게 만든 한덕수가 도원수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을 점검하기 위해 남원으로 내려오자 그를 죽이려다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小坡兒權管)이 되어 단련사(團練使)를 겸임하였는데, 명(明)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하는 군량미를 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1603년(선조 36)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를 거쳐, 1607년(선조 40) 남원판관(南原判官)이 되었다. 그 뒤에 서울로 올라와서, 원수 한덕수를 찾아 활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관무재(觀武才)에 급제하고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되었다가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옮겼으며, 1622년(광해군 14) 평안좌도방어사(平安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9월 3일)

1623년(인조 1) 평안도방어사(平安道防禦使)로 승진하였다가, 평안도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로 옮겼다.(『인조실록』 2년 1월 29일)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웠으므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훈되고 학성군에 봉해졌다.(『인조실록』 2년 2월 14일),(『인조실록』 2년 3월 8일) 뒤이어 평안도구성부사(龜城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에 다시 복관되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거쳐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한때 투옥되었다.(『인조실록』 3년 1월 25일),(『인조실록』 4년 3월 21일) 그 뒤에 풀려나서 1634년(인조 12) 훈련원(訓練院) 도정(都正)을 거쳐 황해도병마사(黃海道兵馬使)가 되었다. 다음 해에 휴가를 얻어 고향 영암으로 돌아왔다가 질병에 감염되어, 1635년(인조 13) 2월 2일 고향집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9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인조가 치제(致祭)와 증관(贈官)을 명하여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남계집(南溪集)』 권72 「황해도병마절도사학성군증병조판서김공신도비명(黃海道兵馬節度使鶴城君贈兵曹判書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완비명」으로 약칭]

성품과 일화

천성이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여, 남의 선한 것을 보면 자신의 몸에 선한 것이 있는 것처럼 기뻐하였고, 남의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장차 자신의 몸을 더럽힐 것 같이 싫어하였다. 벼슬살이를 하고 군사를 행진할 때에는 한결같이 법도를 따라 성패(成敗)와 이해(利害) 관계 때문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이 없었고, 이러다가 가끔 곤경에 처하더라도 일찍이 스스로 후회하지 않았다.[「김완비명」]

체격이 남보다 아주 크고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며, 힘은 능히 큰 가마솥을 들어 올리고, 활 쏘는 재주가 특별히 출중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21세였는데, 힘이 세고 용감하다고 알려져서, 전라도병사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예속되어 남원·구례 등지에서 왜적을 쳐부수어, 주장(主將)의 칭찬을 받았다.1601년(선조 34) 사신 정광적(鄭光績)을 따라서 명나라 북경(北京)에 들어가는 길에 중국 사람들이 모여 과녁을 세워놓고 활쏘기를 하는 무리를 만났다. 활을 쏘는 자 2인이 각기 세 발의 화살을 맞추자, 구경하는 자들이 통쾌하다고 환호하면서 “그대의 나라에도 활을 잘 쏘는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김완이 나서며 ‘그렇다’고 응답하고, 두 사람의 화살을 가져다가 연달아 아홉 발의 화살을 적중시켰다.[「김완비명」]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을 격파한 뒤에 영해군(瀛海君)김기종(金起宗)이 김완의 군영(軍營)에 찾아가니, 사로잡힌 반군 수십 명을 군중(軍中)에 잡아두고 있었다. 김기종이 “어찌하여 죽이지 않는가” 하고 묻자, 김완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불행스럽게 반란군에게 가담하였다고 하더라도, 본래 모두 양민(良民)인데, 어떻게 죽이겠는가”라고 하고, 모두 가벼운 형벌에 처하고 석방시켰다. 이후 공신의 등급을 결정할 때 김완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하면, 진무공신의 1, 2등의 높은 등급에 두어야 마땅한데도 정권을 잡은 실권자가 그를 3등에 두었으나, 김완은 끝내 불평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식자(識者)들이 칭찬하기를, “중국 후한(後漢)의 대수장군(大樹將軍) 풍이(馮異)의 풍도가 있다”고 하였다.[「김완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무이다. 묘소는 전라도 해남현(海南縣) 동북쪽 강산(舡山)의 선영에 있었는데, 1718년(숙종 44)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로 옮겼다. 지금 묘역에서 150m 떨어진 마을 뒷산 기슭에 높이 207cm, 너비 85.5cm의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는데, 박세채(朴世采)가 짓고,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이 전서(篆書)하였으며, 조명교(曺命敎)가 글씨를 썼다. 또 1640년(인조 18) 영암의 유림들이 구고사(九皐祠) 김완 장군 부조묘(不祧墓)를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의 생가터에 창건하여 제향하였는데, 그 뒤에 후손 김진문(金振門)·김여준(金汝峻)·김여옥(金汝沃)을 아울러 합사(合祀)하였다. 그러나 1889년(고종 22) 구고사가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1946년 영암 유림의 발의로 중건되었다. 지금의 부조묘에는 김완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보물 제 1305호인 김완의 영정(影幀)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다. 또 1887년(고종 4) 그 후손과 영암 유림들이 ‘학성군김공승전유허비(鶴城君金公勝戰遺墟碑)’를 세우고 그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첫째 부인 영암 최씨(靈巖崔氏)는 최복겸(崔復謙)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고, 둘째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심언겸(沈彦謙)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장남 김여수(金汝水)는 북병사(北兵使)를 지냈고 해성군(海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차남 김여하(金汝河)는 충의위(忠義衛)이다. 서자(庶子)는 김여해(金汝海)이고, 서녀는 군수(郡守)유흘연(柳屹然)에게 출가하였다. 맏손자 김세기(金世器)는 남병사(南兵使)를 지냈고, 학림군(鶴林君)에 습봉되었다. 3대가 지명(地名)을 달리하여 습봉되는 관례는 옛날부터 드물게 있었다.[「김완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난중잡록(亂中雜錄)』
  • 『남계집(南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