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관(宮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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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종 별궁에서 일하던 내명부(內命婦)의 정5품에서 종9품까지의 여관(女官).

개설

궁관(宮官)은 내명부의 하나로서 대전(大殿)에 속하는 상궁 이하 주변궁(奏變宮)까지와 세자궁(世子宮)에 속하는 수규 이하 장의까지를 일컫는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봉직하던 내명부의 여관 가운데 정5품 상궁에서 종9품 주변궁까지 품계를 받고 각종 별궁에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초기부터 ‘내관’ 또는 ‘여관’ 등으로 부르던 궁녀 조직이 성종대에 와서 『경국대전』에 ‘내명부’라 명시되고, 조선말기까지 수정 없이 그대로 불렸다. 궁중에서 각각 맡겨진 직무에 따라 공적인 일부터 사사로운 시중까지 다양하게 왕 및 왕실을 보필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삼국시대 이래 왕권이 확립되면서 궁관의 조직은 궁중의 운영을 위한 비빈(妃嬪) 중심의 궁녀 조직으로 확립되었다. 이것을 계승하고 조직화한 것이 고려의 내직 제도이다. 그러나 고려말까지도 비빈을 비롯한 궁녀 조직은 구체적인 조직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초에 고려의 내직 제도를 바탕으로 중국 당·송·명나라 등의 제도를 참고한 내명부 제도가 성립되었다. 궁중의 여성 조직은 왕의 배우자로서 품계를 초월한 왕비와, 직임을 가진 내명부, 그리고 품계가 없는 궁인인 잡역 궁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왕과 왕비를 모시고 궁중 내의 일정한 직임을 맡아보며 아래로는 잡역 궁인을 부렸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명부에는 크게 두 계층이 있었다.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왕의 후궁 계층으로 내관이라 하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까지는 상궁 계층으로 궁관이라 하였다.

궁관은 일정한 직임과 품계를 가지고 궁중 운영의 핵심이 되었던 계층이다. 위로는 왕비와 내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품계를 받지 못한 잡역에 종사하는 하층 궁녀를 부렸다. 세자궁에도 역시 내관과 궁관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궁관의 조직은 1397년(태조 6) 3월에 상서사(尙瑞司) 판사(判事)조준(趙浚)과 정도전이 입안하였다. 현의(賢儀) 정·종1품 각 1명, 숙의(淑儀) 정·종2품 각 1명, 찬덕(贊德) 정3품 1명과 종3품 2명, 순성(順成) 정4품 1명과 종4품 2명, 상궁(尙宮) 정5품 1명과 종5품 2명, 상관(尙官) 정6품 1명과 종6품 2명, 가령(家令) 정·종7품 각 2명, 사급(司給) 정·종8품 각 2명, 사식(司飾) 정·종9품 각 2명 등 총 28명이었다. 이 중에서 1품 현의에서 2품 숙의까지는 내관에 해당되며, 3품 찬덕에서 9품 사식까지가 궁관으로 추측된다.

1401년(태종 1) 태종은 태조궁(太祖宮)인 태상전(泰上殿) 여관의 월봉(月俸)을 부활시키고, 하륜(河崙)과 권근(權近) 등에게 하(夏)·은(殷)·주(周)나라 3대 이하 역대 군왕의 비빈·시녀의 수와 고려 역대 비빈·시녀의 수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1405년(태종 5) 내관 제도는 현의 1명, 숙의 1명, 찬덕 1명, 순덕(順德) 2명, 사의(司儀) 2명, 사침(司寢) 1명, 봉의(奉衣) 2명, 봉선(奉膳) 2명 등 총 12명으로 정하였다. 명칭상 현의, 숙의, 찬덕까지는 내관에 해당되며 순덕 이하 봉선까지는 궁관에 해당된다.

본격적인 궁관 제도가 정비된 것은 1428년(세종 10)이다. 당시 궁관은 정5품 상궁·상의(尙儀)·상복(尙服)·상식(尙食)·상침(尙寢)·상공(尙功)·상정(尙正) 각 1명, 정6품 사기(司記)·사빈(司賓)·사의(司衣)·사선(司膳)·사설(司設)·사제(司製) 각 1명, 정7품 전언(典言)·전찬(典贊)·전식(典飾)·전약(典藥)·전등(典燈)·전채(典綵)·전정(典正) 각 1명 총 20명이다. 이때부터 비빈에 해당되는 내관과 궁중의 일을 처리하는 궁관이 구별되었다. 궁관은 상(尙) 자가 붙은 정5품, 사(司)가 붙은 정6품, 전(典) 자가 붙은 정7품으로 구성되었다. 각 품계마다 담당 업무가 배정되었다.

『경국대전』「이전(吏典)」 ‘내명부’ 중 궁관 제도를 보면, 정5품 상궁·상의 각 1명, 종5품 상복·상식 각 1명, 정6품 상침·상공 각 1명, 종6품 상정·상기(尙記) 각 1명, 정7품 전빈(典賓)·전의(典衣)·전선(典膳) 각 1명, 종7품 전설(典設)·전제(典製)·전언 각 1명, 정8품 전찬·전식·전약 각 1명, 종8품 전등·전채·전정 각 1명, 정9품 주궁(奏宮)·주상(奏商)·주각(奏角) 각 1명, 종9품 주변징(奏變徵)·주징(奏徵)·주우(奏羽)·주변궁 각 1명으로 총 27명이다. 품계가 ‘상’ 자인 정·종 5·6품, ‘전’ 자인 정·종 7·8품, ‘주’ 자인 정·종 9품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1430년(세종 12) 윤12월에 태종 때의 내관제와 중국의 옛 제도를 참고하여 동궁 내관의 관제·칭호·품질 등을 정하였다. 당시 동궁 궁관 제도는 종6품인 사규(司閨)·사칙(司則)·사찬(司饌) 각 1명, 종8품인 장정(掌正)·장서(掌書)·장봉(掌縫)·장장(掌藏)·장식(掌食)·장의(掌醫) 각 1명으로 총 9명이다. 즉, 동궁은 왕에 비해 전체적으로 직의 등급이 낮고 그 규모도 작았다. 품계는 1품은 없고 정2품 양제부터 정5품 소훈까지가 동궁 후궁인 내관이며, 종6품 사규부터 종8품 장의까지는 궁관이다. 품계에서 내관은 정품(正品)으로만 되었고, 궁관은 종품(從品)으로 구별하였다. 인원수는 내관 4명, 궁관 9명으로 총인원 13명이었다. 궁관은 ‘사’ 자는 대전 궁관이 정6품이라면 세자궁은 종6품이며, ‘장’ 자는 종8품으로 대전과는 차이를 보인다.

『경국대전』의 세자궁 궁관 제도를 보면, 종6품 수규(守閨)·수칙(守則) 각 1명, 종7품 장찬(掌饌)·장정 각 1명, 종8품 장서·장봉 각 1명, 종9품 장장·장식·장의 각 1명으로 총 9명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종6품과 종8품이 정품 없이 종6·7·8·9품으로 구성되어 명칭상 변화를 보인다. 크게 ‘수’ 자 계열과 ‘장’ 자 계열로 구분하고 있다.

기능과 역할

내명부는 기능이 내관과 궁관으로 크게 양분되고 품계에 따라 각기 고유의 직무가 부여되었다. 궁관은 왕을 모시고 궁중 실무를 맡았다. 상궁은 정5품으로 왕비를 인도하며, 정6품인 사기와 정7품인 전언을 통솔하였다. 사기는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맡았으며, 전언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 구실을 하였다. 상의는 정5품으로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고, 정6품인 사빈과 정7품인 전찬을 통솔하였다. 사빈은 손님을 접대하고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하였다. 그리고 잔치를 관장하고 왕이 상을 주는 일 등을 맡아 처리하였다. 전찬은 손님 접대와 신하가 왕을 뵐 때의 접대와 잔치, 그리고 정승을 도와 앞에서 인도하는 일 등을 맡았다.

상복은 정5품으로 의복과 수로 무늬 놓은 채장(采章)의 수량을 공급하고 정6품인 사의와 정7품인 전식을 통솔하였다. 사의는 의복과 장식품을 머리에 꽂는 수식(首飾)을 맡았으며, 전식은 머리 감고 화장하는 고목(膏沐)과 세수하고 머리 빗는 건즐(巾櫛)을 맡았다. 상식은 정5품으로 음식과 반찬을 종류대로 가지런히 준비하고, 정6품인 사선과 정7품인 전약을 통솔하였다. 사선은 삶고 졸여 간을 맞추는 반찬을 만들었고, 전약은 처방에 의한 약을 맡았다.

상침은 정5품으로 평상시 왕을 뵐 때와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인 진어(進御)하는 순서를 맡았고, 정6품인 사설과 정7품인 전등을 통솔하였다. 사설은 피륙을 여러 폭으로 둘러친 포장인 위장(茯帳)과 왕골로 만든 자리인 인석(茵席), 그리고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쓰는 쇄소(灑掃)하는 일과 물건을 내놓고 베풀어놓는 장설(張設) 등을 맡았다. 전등은 등불과 촛불을 맡았다. 상공은 정5품으로 여공(女功)의 과정을 맡았고, 정6품인 사제와 정7품인 전채를 통솔하였다. 사제는 의복을 만들었고, 전채는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았다. 궁정은 정5품으로 궁녀들의 품행과 직무에 대하여 단속하고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였다. 전정은 정7품으로 궁정의 일을 도왔다.

조선초기에는 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과도기였으므로 궁관 계층과 잡역 궁인을 구별 없이 기록하고 있어 내용으로만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궁관의 명칭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다. 1428년 제도가 제정된 이후 서서히 명칭이 일반적으로 정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궁관은 왕비의 친정아버지 상(喪)에 왕비를 따라서 상복을 입고, 왕 및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참최복(斬衰服)을 입으며, 동궁의 배필 간택 때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이들은 국가에서 대우를 받았는데, 내관은 예외였지만 궁관은 녹을 받았다.

궁녀 수는 얼마나 될까. 『경국대전』 직제상의 인원은 실제 인원이 아니다. 조선후기 성호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지금 환관이 335명이고, 궁녀가 684명이다.” 하였다. 조선후기 각종 자료의 기록도 이와 비슷하다. 연산군 때는 1천 명까지 늘어난 경우도 있으며, 고종 말기에는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궁녀의 수도 약 200명 정도로 줄었다.

변천

1894년 7월 22일 군국기무처에서 올린 제의 안건에 의해 궁내부·종정부·종백부 관제를 정하면서 상궁들은 명부사(命婦司)에 소속되었다. 궁관들이 있던 명부사의 상궁 이하 궁녀 수는 필요한 때에 따라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녀의 수를 대전 100명, 대비전 100명, 중궁전 100명, 세자궁 60명, 세자빈궁 40명, 세손궁 50명, 세손빈궁 30명이라고 하였다. 총 380명 정도이다.

1907년 전후 내시부는 궁내부로 흡수되고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러나 일부 궁녀들은 궁중에 남아있었다. 1926년 2월 1일부터 1926년 3월 31일까지 궁궐 내에서 생활하던 순종의 하루 일상을 기록한 책인 『내전일기』에는 숙직 나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궁녀들은 궁 밖에서 생활하였다. 결국 전제 왕권과 함께 유지되던 환관과 궁녀제는 조선의 멸망과 함께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일지사, 1983.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 신명호, 『궁녀: 궁궐의 꽃』, 시공사, 2004.
  • 이영숙, 「조선초기 내명부에 대하여」, 『역사학보』 96, 198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