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레코드사
DH Edu
1930년대 우리 자본으로 이루어진 대표 음반 회사
개요
기사 속 <노래조선> 사진, 1936.04.19. 조선일보 6면[1]
김능인 감독의 <노래조선>[2]은
1936년 오케(Okeh)레코드가 경성촬영소와 협업하여 제작,
1936년 4월 15일 조선극장에서 개봉[3],
오케레코드 전속 가수 일행의 일본 오사카 공연 장면과 국내에서 촬영된 코믹 춘향전을 편집하여[4]만든
조선 최초의 뮤지컬 영화이다.
내용
배경
20세기 전후로 우리나라에 진출한 서구의 메이저 회사들은 수입품과 사치품이라는 인식과 콘텐츠의 부족,음질의 열악함과 기타 녹음,제작과 판매 수익의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고 철수한다. 철수한 그 자리는 일본축음기상회의 독식으로 한동안 지속되다가 1925년 일동레코드사의 출현으로 양대 경쟁구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이후 우리나라 음반 시장의 잠재성을 깨닫게 된 세계 굴지의 음반 회사들이 1928년 전기 녹음 방식의 기술혁신을 앞세워 일본을 거점으로 우리 시장에 뛰어들게 되었고, 서구 메이저 회사들의 재진출과 우리 자본을 포함한 일본과의 합작회사, 군소 음반회사들이 차례로 들어서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반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1930년대 레코드 시장은 6대 메이저 회사[5]가 합병과 태동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설립
오케레코드는 그라마폰오케축음기상회를 운영하던 이철이 1933년 일본의 데이치쿠(帝蓄,帝國蓄音機商會)와 기술제휴를 맺고 설립한 레코드회사로
참고문헌
안재석, 2019,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p264
주석
- ↑ 「오케영화제작소의 노래조선」, 『조선일보』, 1936.04.19. 6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안재석(2019)에 따르면 지금까지 김상진 혹은 김상진과 김능팔이 공동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신문기사(≪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14일자 3면 ; ≪동아일보≫ 1936년 4월 17일자 3면)에는 <노래조선>의 감독⋅구성이 김능인(金陵人)으로 소개되어 있다. 김능인(1911∼1937)은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 ‘휘파람’ 등의 작사가로, 1936년까지 오케레코드의 초대 문예부장을 지내다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성영화 <종소리>(1929), <방아타령>(1931)의 감독 김상진이 오케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오케그랜드쇼단의 기획 일을 본 것은 김능인이 퇴직한 이후이며, 김능팔은 ‘金陵人’의 오독(誤讀)이다.
- ↑ 「전발성음악영화 노래조선 조선극장 상영」, 『동아일보』, 1936.04.17.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노래조선> 기본정보/줄거리」,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nline , 한국영상자료원. - ↑ 일본빅타, 일본콜럼비아, 시에론, 폴리돌, 태평, 오케레코드를 칭한다
기여
*KJG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