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레코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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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사


1930년대 우리 자본으로 이루어진 대표 음반 회사


기사 속 오케레코드사 건물 사진, 1934.12.08. 조선중앙일보 2면[1]


개요


지도를 불러오는 중...


오케레코드는 강점기 이 땅에서 독자적으로 태동된 회사이며 설립자 이철이 그의 부인 현송자의 도움과 일본 제국축음기 주식회사의 협력으로 세웠다.[2] 레코드 사업에만 그치지 않고 설립과 동시에 오케연주회와 오케재즈밴드라는 레뷰단을 조직하여 경성, 부산, 목포,개성, 평양, 원산 등의 전 조선 흥행을 거쳐, 1936년부터는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나고야 등지의 동포를 대상으로 한 일본 공연을 했고, 또 이후에도 몇 편의 뮤지컬 영화와 음악 영화를 더 기획, 제작한 기록이 있다.

내용


배경과 설립


20세기 전후로 우리나라에 진출한 서구의 메이저 회사들은 수입품과 사치품이라는 인식과 콘텐츠의 부족,음질의 열악함과 기타 녹음,제작과 판매 수익의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고 철수한다. 철수한 그 자리는 일본축음기상회의 독식으로 한동안 지속되다가 1925년 일동레코드사의 출현으로 양대 경쟁구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이후 우리나라 음반 시장의 잠재성을 깨닫게 된 세계 굴지의 음반 회사들이 1928년 전기 녹음 방식의 기술혁신을 앞세워 일본을 거점으로 우리 시장에 뛰어들게 되었고, 서구 메이저 회사들의 재진출과 우리 자본을 포함한 일본과의 합작회사, 군소 음반회사들이 차례로 들어서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반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1930년대 레코드 시장은 6대 메이저 회사[3]가 합병과 태동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레코드회사 오케레코드는 그라마폰오케축음기상회를 운영하던 이철이 1933년 일본의 데이치쿠(帝蓄,帝國蓄音機商會)와 기술제휴를 맺고 설립되었다. 1932년 맨 처음 남대문에 영업소를 차리게 된 이철은 그 무렵부터 우리 음반을 내기 시작하였는데 음반의 제작은 데이치쿠에서 담당하며 사장인 이철에게는 가수의 선발권과 운영권의 일부만 인정하는 형태[4]였다.

조직도

오케 레코드사[5]
문예부장 작곡가 작사/작시 가수(째즈송/유행가)
경성책임자:
이철(1932~1937)
문예부장
김능인(1932~)
이철(1938~1940)
방희택
古賀政男
박시춘,윤호월,임석정.
김해송(김송규),손목인(손안드레),이봉룡(이봉용),김용환(조자룡),김준영,남풍월(김능인),박영화(처녀림),조명암(김다인),강사랑(강해인)
작사
조명암(김다인),남풍월(김능인),신불출2,문예부
작시
박영호(처녀림),조명암(김다인),남풍월(김능인),김용호,고마부
째즈송
삼우열,김해송(김송규),손목인(손안드레),이난영
유행가
이난영,고복수,김해송(김송규),남인수,강남향,이은파,김연월,서상양,김정구,장세정,채규엽,이봉룡,이화자
유행소곡
윤백단,이난영

인물


이철-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무대 마스터


  • 이철(본명 이억길)은 당시 뛰어난 무대 기획 능력과 안목을 지녔다고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무대 마스터' 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뒤따랐다.[6]
  • 1903년 6월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한 그는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아저씨뻘 되는 이인규(李寅奎)의 양자가 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양아버지 이인규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다니다가 윤심덕과 만나 친해졌고, 이어 나중에 자신의 매부가 된 김성흠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연희전문 악대부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이철은 악대부의 리더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1924년부터는 영화관에서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근무했다. 그는 악사로 일하면서 음악 서적을 전문적으로 발행하는 백장미사를 경영하기도 했고, 부인과 함께 음반 도매상을 운영했다. 이철의 부인은 배정자의 첫 남편 현영운의 차녀인 현송자이다.[7]
  • 1930년대에는 경성부에서 음반제작사 오케레코드를 설립하였는데, 일본의 제국축음기상회와 관련을 맺기는 했지만 한국인이 세우고 독자적으로 운영한 최초의 음반회사로 평가된다.[8] 오케레코드사에는 김성흠도 기술적인 도움을 주며 참가했다.그의 매제인 김성흠에게 일본에서 제작 공정을 익히도록 하여, 한국에 들어와 음반 제작실을 만들어 국내 유일의 녹음 취입실을 갖추게 되었고,[9] 이로 인해 오케레코드는 다른 음반사들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음반을 공급하여 강점기 하의 음반 시장에서 장기간 흥행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 이철은 음반 발매 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복수, 손목인,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조명암 등 수많은 인기 가수와 작곡가, 작사가들을 그가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신드롬을 일으키는 등 탁월한 흥행감각으로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 1936년 데이치쿠 레코드는 데이치쿠 본사에 경영권을 이야시키고 이철을 문예부장으로 강등시킨다. 1937년경부터는 무대 공연에서 선전을 겸한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전속가수들의 실연 무대를 마련하였는데 당시 연주 단체가 활발하게 되자 신인 선발 콩쿨을 겸한 공연들도 많이 생겨나게 된다. 이철은 무대 공연에 열의를 보여 당시 '오케연주단'을 확장하여, 1938년 10월 '오케 그랜드 쇼'로 발전시켜 나간다. 이철은 이를 위해 3년제의 '오케 무용 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39년 3월 11일부터 '조선악극단'이란 명칭으로 10일간 도쿄 공연을 비롯하여 63일간 오사카, 나고야, 교토, 고베, 간사이 , 규슈 등지에서 204회의 일본 순회 공연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다.[10]
  • 1944년 만주의 상하이 공연 도중 무리한 공연 강행으로 급성 폐렴을 얻어 서울로 옮겼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11]

손목인-작곡가

한국일보 2018년 자료사진[12]


  • 우리 대중음악 사상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고복수의 <타향>,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작곡
  • 1930년 원래 음악공부를 위해 일본의 동경 제국음악학교에서 수학하다 방학 중 오케 레코드의 이철의 눈에 띄어 당시 오케 레코드 전속 작사가인 사촌 문호월의 소개로 1934년 입사
  • 당시 그가 작곡한 오케 레코드 초기 작품들이 잇달아 히트하게 되면서 뒤늦게 출발한 오케레코드를 이후 대중 음악계의 정상으로 올려 놓는 가장 큰 발판 역할
  • 일본 고등 음악 학교에서 작곡 기법과 관현악, 편곡 등을 배우고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스윙 재즈에 자극을 받고 돌아와 1936년 조선 최초의 스윙밴드 오케레코드 전속 C.M.C 밴드를 만듦[13]
  • 일본 공연 도중 일본의 신흥키네마에서 기획한 <춤추는 춘향전>의 음악을 작,편곡 해줄 것을 의뢰 받아 기획, 제작
  • 1940년 9월 새로운 멤버들을 끌어들여 '손목인 악단' 결성
  • 해방 후 C.M.C 악단을 대편성악단으로 확대 편성하여 쇼 프로그램에 기여
  • 경성 방송국의 전속 음악 담당자

고복수-<타향>

고복수 <타향살이>[14]


  • 고복수의 <타향>은 만주와 중국 일대의 교포들에게 가장 애창되는 곡이며 1930년대 초반 당시 5대 음반 회사 가운데 가장 늦게 출발한 오케 레코드가 조선 대중음악계에 선두 주자로 나서는데 발판을 만들어 준 곡.
    1933년 오케 레코드 창립시부터 1937년 요절할 때까지 주옥 같은 유행 가사를 만들어 낸 김능인의 대표곡.
    1934년 오케 레코드로 전속이 된 작곡가 손목인과 가수 고복수의 출세작
  • 발매 1개월 만에 5만매가 팔려 크게 히트 당시 인구 비율과 경제 수준으로 보아 일본에서의 30만장 이상에 필적할 만한 판매량
  • <타향>의 대 히트로 오케 레코드의 간판스타, 제목 <타향 살이>로
  • 발표곡의 연이은 히트로 오케 레코드의 대표가수
  • 데뷔 1년 만에 인기투표 3위[15]
  • 구수하고 기교가 별로 없는 순수한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호감[16]
  • 1939년 3월 <제2타향>과 8월에 <피장파장>을 끝으로 오케 레코드에서의 녹음 끝, 1940년 3월 조직된 '반도 악극좌'에 가입, 오케 그랜드 쇼 무대에서도 사라짐
  • 반도 악극단에서 만난 황금심과 결혼, 해방후 백조 악극단에서 활동[17]
  • 고복수의 많은 노래들은 우리 민족의 한과 울분, 성룸 등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대표적 노래로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걸그룹, 보이그룹의 원조 '저고리시스터즈', '아리랑보이즈'

악극단에서 김정구(왼쪽에서 세번째)와 함께 노래부르는 걸그룹의 비조'저고리시스터즈' 왼쪽부터 이준희, 김능자, 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서봉희., 1973.03.21. 동아일보 5면[18]


이철은 '타향살이'의 고복수를 스카우트했고, 엘리지의 여왕인 이난영을 납치하다시피 모셔왔던 흥행의 귀재였다. 그런 그가 1935~39년 결성한 것이 바로 '저고리시스터즈'다.
이미 '목포의 눈물'로 스타덤에 올랐던 이난영과 '연락선을 떠난다'의 장세정은 '비조 걸그룹'의 핵심보컬이었다. 여기에 일본 쇼치쿠 및 다카라스카 가극단 출신의 이준희와 김능자, 가수겸 무용가인 서봉희까지 5인조 걸그룹이었던 셈이다.
해외파까지 가세한 당대의 톱가수와 무용가가 총출동해서 노래와 연기, 춤 등 다재다능한 재능을 선보였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김정구는 생전에 저고리시스터즈의 무대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Quote-left.png "저고리시스터즈…. 그 얼마나 소박하고 우리 구미에 맞는 이름입니까. 이난영과 장세정이 색동저고리와 족두리를 썼고….서양노래를 부를 땐 새하얀 드레스로 맞춰입고. 이들이 무대에 서면 훤했습니다."[19] Quote-right.png
출처: 『동아일보』, 1973.03.21


노래의 컨셉트에 따라 의상도 다채롭게 바꾸었으니 요즘의 걸그룹과 다를 바 없다. 저고리시스터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이철은 김해송・박시춘・송희선・현경섭・이복본 등을 멤버로 '아리랑보이즈'를 결성했다.
이 역시 보이그룹의 비조인 셈이다. 저고리시스터즈는 이후 '아빠는 풍각쟁이야'의 박향림과 심연옥・나성려 등을 새 멤버로 들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해방후 해산됐다.[20]

Timeline

참고문헌

안재석,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2019
박수현, ⌜1930년대 한국 대중 음악 산업의 고찰 - 오케 레코드 사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대중문화예술대학원, 2004
박도현, ⌜1930년대 레코드사 마케팅에 나타난 대중음악의 고찰⌟, 경희대학교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2011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대중예술 흥행사이자 음반기획 제작자였다, 데일리월간조선뉴스룸, 조선뉴스프레스, 2003년 7월
어학원 터, 여기서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이 시작됐다, 오마이뉴스, 2021년 3월 29일
마지막 조선악극단 영화의 다행, 이준희, 한국영상자료원, 2015년 8월 3일
이준희의 영화사산책 ① - 미완의 음악영화, 이준희, 한국영상자료원, 2009년 11월 10일
오케레코드, 문화콘텐츠닷컴, 한국콘텐츠진흥원
오케레코드, 위키백과
이철, 위키백과
황문평, 『한국대중연예사』, 부르칸모르, 1989
황문평, 『가요백년사』, 지구 오디오비디오 황문평, 『노래백년사』 박찬호, 『한국가요사』, 현암사, 1992
『삼천리』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뉴스메이커』

주석

  1. 세모·대경성의 불안상 백주남문상가에 낭인풍깽 단돌현」, 『조선중앙일보』, 1936.04.19. 6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2. 1935년 ⌜조광⌟ 11월호에 "우연한 기회에 제축의 간부를 만난 이철 씨가 오케 레코드를 창태 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3. 일본빅타, 일본콜럼비아, 시에론, 폴리돌, 태평, 오케레코드를 칭한다
  4. 황문평, ⌜한국대중연예사⌟, 『부르칸모르』, 1989, p168
    박찬호, ⌜한국가요사⌟, 『현암사』, 1992, p446-51
  5. 박도현, ⌜1930년대 레코드사 마케팅에 나타난 대중음악의 고찰⌟, 경희대학교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2011, p31
  6. 박수현, ⌜1930년대 한국 대중 음악 산업의 고찰 - 오케 레코드 사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대중문화예술대학원, 2004
  7. 이철(1903년), 위키백과
  8. 레코드판, 대한민국 문화관공부 e뮤지엄. 2007년 9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06월 24일에 확인
  9. ⌜정훈모여사의 레코-드 취입광경, 오-케 취입실에서⌟, 『삼천리』 1935년 9월호
  10. 박수현, ⌜1930년대 한국 대중 음악 사업의 고찰-오케 레코드 사를 중심으로⌟, 2004 p86-87
  11. 이동균, ⌜일제시대 조국의 노래를 지어냈던 이철의 삶과 예술 그리고 조국⌟, 월간조선 2003년 7월호
  12. 손목인 (1월 9일)」, 『한국일보』, 2018.01.09. 『한국일보』online, 한국일보.
  13. 조선뮤지컬 클럽의 약칭, 1938년 당시 '오케 그랜드쇼'의 중심역할, 손목인이 리더로 색소폰에 송희선, 윤학구, 엄재근, 트럼펫에 현경섭, 지방열, 트롬본에 이유선, 이용호, 바이올린에 강삼준, 기타에 박시춘, 김홍산, 베이스에 유연, 드럼에 이봉룡, 피아노에 손목인. 최창익, 『한국대중가요사』, 한국대중예술문화원, 2003년, p116.
  14. 탄생 100주년을 맞은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의 삶과 노래」, 『뉴스메이커』, 2012.10.17. 『뉴스메이커』online, 뉴스메이커.
  15. 이난영 '이난영의 인기'
  16. 황문평, 『가요백년사』, 지구 오디오비디오, p33
  17. 황문평, 『노래백년사』, p123-7
  18. 조선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최초의 보컬그룹「저고리 시스터즈」┈좌로부터 이준희,김능자,김정구,이난영,장세정,박향림,서봉희」, 『동아일보』, 1973.03.21. 5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9. 조선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최초의 보컬그룹「저고리 시스터즈」┈좌로부터 이준희,김능자,김정구,이난영,장세정,박향림,서봉희」, 『동아일보』, 1973.03.21. 5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20. ‘걸그룹의 비조’ 저고리시스터즈, 『경향신문』, 2017.01.23. 『경향신문』online, 경향신문.

기여

*KJG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