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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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
<목포의 눈물> 가사지에 실린 이난영의 사진
본명 이옥례(李玉禮)
호적명 : 이옥순(李玉順)
예명 일본식 이름 오카 란코(岡 蘭子)
출생 1916년 6월 6일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목포
사망 1965년 4월 11일 (48세)
대한민국 서울
직업 가수, 前 연극배우
장르 트로트
활동 시기 1930년 ~ 1965년
배우자 김해송
가족 자녀는 4남 3녀
오빠 이봉룡(가수 겸 작곡가)
조카딸 이민자(가수)
종교 천주교(세례명: 마리아)


개요

엘레지[1]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난영은 1935년 9월 <목포의 눈물>을 통해 일제 시대 우리 대중음악의 전성기의 시작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광복 이전에 이난영이 발표한 노래는 약 225곡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남자 가수와 여자 가수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노래를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2] 1965년 4월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일제 치하에서 늘 한복을 입고 생전에 1000여 곡 이상을 발표했던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가 만들었던 불세출의 슈퍼스타로 그녀의 업적을 기려 1966년 목포에 그녀의 <목포의 눈물> 기념비가 세워지고 매년 '난영 가요제'가 열린다.[3]

내용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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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년 / 6월 6일 목포 양동 출생(본명은 옥례(玉醴)로 알려져 있으나 호 적에는 옥순(玉順))
  • 1923년 / 현 북교 초등학교(당시 목포 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 4학년 때, 학교 중퇴(자퇴 사유는 ‘거주지 이전’)
  • 1932년 / 목포에서 태양극장(단) 입단하여 무대 활동 시작
  • 1933년 / 9월, 태평 음반회사에서 <시드는 청춘>과 <지나간 옛 꿈>으로 데뷔, 같은 해 10월, 오케 음반회사에서 <향수>로 다시 데뷔.이때부터 1943년까지 오케 음반회사 전속 가수로 활동
  • 1935년 / <목포의 눈물> 발표, 잡지 <삼천리>에서 발표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에서 여자 가수 부문 3위에 선정
  • 1936년 /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인 <노래 조선> 출연, 일본 테이치쿠 음반회사에서 오카란코(岡蘭子)라는 예명으로 <春の歓喜> (테이치쿠 50287), <別れの船歌>(테이치쿠 50344), <アリランの 唄>(테이치쿠 50344) 등을 발표
  • 1937년 / 11월 4일 김해송과 결혼(호적 기준)
  • 1939년 / 조선악극단 일원으로 일본에서 영화, <思ひつき夫人>6)에 출연, 이화자 등과 함께 <아리랑> 등을 부름
  • 1939년 / 장세정 등과 저고리시스터로 활동
  • 1941년 / 오케 음반회사에서 표창장 수여 및 기념 공연 개최 1943년 도쿄 영친왕 저택에서 조선악극단원들과 공연
  • 1944년 / 약초가극단 일원으로 만주 순회공연
  • 1945년 / 만타악극대를 거쳐 K.P.K악단에서 주연으로 활동 시작
  • 1948년 / 김해송의 여자 문제에 상심, 춘천 소양강에서 자살 기도
  • 1950년 / 서울 수복 이후에 김해송 납북 및 사망, 어머니 박소아 사망
  • 1951년 / K.P.K 악단과 현대가극단 등에 출연.
  • 1952년 / 백조가극단 공연에 특별 출연
  • 1953년 / K.P.K 악단 후신으로 ‘이난영 악단’ 운영
  • 1955년 / ‘이난영 악단’ 해산
  • 1957년 / 동료가수 남인수와 본격적으로 친해짐
  • 1958년 / 12월에 김시스터즈가 일본으로 갔다가 1959년 1월에 미국 도착.
  • 1959년 / 이난영의 아들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즈 데뷔, 문화영화 <흘러간 옛 노래> 출연
  • 1961년 / LKL레코드에서 다수의 SP 음반과 독집 LP 음반 재 취입 1962년 남인수 사망 후, 김시스터즈 초청으로 미국행
  • 1963년 / 김시스터즈와 함께 자선 공연, 시카고와 하와이 공연 등을 거친 후 귀국
  • 1964년 /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영화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 제작 1965년 시공관에서 마지막 공연
  • 1965년 / 4월 11일 이난영 타계
  • 1969년 / <목포의 눈물> 노래비 설립, 영화 <이 강산 낙화유수>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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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이난영의 인기

인기가수 선발대회[4]
남자가수 순위 여자가수
이름 소속회사 득표수 - 이름 소속회사 득표수
채규엽 콜럼비아 1,844표 1등 왕수복 폴리돌 1,903표
김용환 폴리돌 1,335표 2등 선우일선 폴리돌 1,166표
고복수 오케 6744표 3등 이난영 오케 873표
강홍식 콜럼비아 468표 4등 전옥 폴리돌 387표
최남용 태평 333표 5등 김복희 빅타 348표

[5]

이난영 1935년 9월 신보로 <목포의 노래>가 발매되면서 대대적인 히트를 기록, 고복수와 함께 오케 레코드의 간판 스타 가수가 되었다. 당시 이 노래는 5만장 이상이 팔려 나갔는데 당시 축음기 대수로 본다면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삼천리』에서 조사한 '레코드 인기 가수 투표 결선 발표'에서 신민요 가수인 왕수복, 신일선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목포의 눈물>의 실적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9년 그녀의 남편인 김해송이 아내를 위해 작곡한 블루스 조의 음악인 <다방의 푸른 꿈>으로 이미지 변신을 보이며 히트, 1942년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의 대대적인 히트로 다시 한번 최고의 인기가수에 자리한다. 당시 1943년 월간 잡지 『조광』의 한 글에서 음반사 별로 인기 유행 가수로 오케레코드의 이난영을 언급했는데 오케 레코드의 인기 여가수 이난영이라기 보다는 조선악극단의 이난영으로 더 유명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현경섭의 유품 중에는 1939 년과 1940년에 현경섭이 거의 매일 쓴 일기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현경섭의 삶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활동하던 다른 가수들에 대한 언급도 확인할 수 있다. 현경섭은 공연에서 이난영이 있는가와 없는가에 따라 관객의 반응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일기장에 적어서 당시 이난영의 인기를 증명해주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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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를 새롭게 할 것 없이 이난영은 조선유행가계의 큰언니다. 조선 의 유행가란 이난영으로부터 출발했고 이난영으로하여금 존재한대도 과 언이 아닐 만큼 열여섯살부터 지금까지 부른 노래도 수없지만 걸작도 많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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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 1940.03.31


이난영을 둘러싼 이야기들

등단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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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터넷 등에서 이난영의 등단 곡을 <불사조>로 언급한 것 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1933년 11월에 발매된 <불사조>가 이난영의 첫번째 흥행 성공 노래는 맞으나 등단 곡은 아니다. 이난영의 등단 곡은 1933년 9월에 태평 음반회사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과 <지나 간 옛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33년 10월에 오케 음반회사에서 발매 된 <향수>도 오케 음반회사의 입사곡이자 등단 곡으로 언급할 수 있다. 태평 음반회사와 오케 음반회사의 등단 곡을 모두 언급하는 이유는 이난영의 전속계약 문제와 관련이 있다. 전속가수제도때문에 당시의 가수들은 여러 음반 회사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없었다. 이난영은 처음에 태양극단에서 막간 가수로 활동했고 태평 음반회사에서 노래를 녹음하였다. 하지만 이난영의 노래를 들은 오케 음반회사의 이철은 그 녀가 태평 음반회사와 정식으로 전속 계약을 맺기 전에 그녀를 오케 음반회사로 데려오려고 변장을 시키고, 태평 음반회사 사람들과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등의 암투를 벌였다.[8] 결국 이난영은 오케 음반회사 와 전속계약을 맺었고 그 이후로 그녀는 거의 모든 노래를 오케 음반회사에서 발매했다.
그런데 이난영이 1930년대에 회견한 내용에 따르면, 이난영이 태양 극단의 일원으로 일본 오사카(大阪)에 갔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과 병원비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태평 음반 회사에서 <도라지 도라지>라는 제목의 ‘도라지 타령’을 취입해서 한동안 그 노래가 일본 오사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팔린 성적도 좋았으나 태평 음반회사에서 돈을 주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마저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고 밝혔던 것이다.[9]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난영이 불렀다는 <도라지 도라지> 음반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이난영이 오케 음반회사에서 1934년에 <도라지 타령>을, 1936년에 <또 도라지>라는 노래를 발표하긴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에 불렀다는 <도라지 도라지>는 아직까지 찾을 수 없으므로 현재까지는 <시드는 청춘><향수>를 이난영의 등단 곡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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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친일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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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이난영이 부른 군국가요로 확실한 것은 징병제 실시 기념으로 제작한 <이천오백만의 감격>[10]이다.남인수와 이난영이 함께 부른 이 노래에서 남인수가 주창을, 이난영이 남인수와 함께 후렴을 불렀 다. 물론 이난영이 주창이 아닌 부창을 했다고 해서 이난영이 군국가요를 불렀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이천 오백만의 감격> 외에 제목에서 군국가요로 추정되는 노래는 김정구와 함께 부른 <아세아의 합창>과 남인수와 함께 노래한 <희망 젖은 총성>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음원이나 가사지 등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 군국가요로 단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 외에 <신춘엽서>와 <열녀비>도 군국가요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신춘엽서>는 그 가사가 온전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11] 일종의 군국가요 모음집인 『오케가요극장』에 군국가요 다섯곡과 함께 실려 있다.[12]하지만 <신춘엽서>와 <열녀비> 모두 전형적인 군국가 요가 보여주는 행진곡풍의 노래는 아니다. 게다가 가사만 볼 때, 오히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어 군국가요로 확신하기 어렵기도 하다. 일부 알려진 <신춘엽서>의 가사는 전선에 간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편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편지 내용은 전쟁으로 해체된 가족의 비극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열녀비>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13]
일제 말에 나온 군국가요에 대한 평가나 이와 관련이 있는 가요인들에 대한 평가는 쉽지않다. 일단 일제말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 시기의 예술인들은 기본적으로 기예증을 받지 못하면 예술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제의 강요와 강압에 따라 음반회사들은 일반적인 대중가요보다 군국가요 음반을 더 많이 발매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속 가수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군국가요 음반 제작에 참여해야 했다. 물론 그것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나, 그러한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군국가요를 불렀다는 것만으로 어떤 단정과 평가를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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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목포의 눈물>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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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곡자 문호월의 아들이 KBS ⌜가요무대」와의 면담에서 “어머니께서 문일석을 일러, 아버지 문호월이라고 하셨다”고 말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문일석이 문호월이었다면 <목포의 눈물> 작곡자인 손목인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왜냐하면 문호월과 손목인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이다. 문일석이 윤재희라는 설이 현재로는 가장 유력하나 이 또한 결정적인 단서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해서 정설로 인정하려면 다른 방증 자료가 더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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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연출가이자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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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은 남편인 김해송이 납북된 후, 그가 이끌던 K.P.K 악단을 운영했고, 1953년에는 ‘이난영 악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양한 공연 무대를 기획해서 올렸다. 특히 본고에서 주목한 것은 이난영의 딸과 조카로 이루어진 ‘김시스터즈’의 결성에 있어서 이난영이 보여준 결단과 활약이다. 김시스터즈의 결성에 있어서 이난영의 구실이 거의 절대적이었는데, 이번 김숙자 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이를 확인하였다. K.P.K악단 시절에도 이난영은 김해송을 도와 극단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김해송이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남자 배우가 없다고 고민하자, 이난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타나 로미오 역을 했었다. 특히 이난영은 무대 의상 등에도 직접 관여하는 식으로 K.P.K 악단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해송이 없는 악단에서 공연을 기획하고 올리면서 기획력과 연출력을 쌓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시스터즈’도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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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참고문헌

박도현, ⌜1930년대 레코드사 마케팅에 나타난 대중음악의 고찰⌟, 경희대학교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2011.
박수현, ⌜1930년대 한국 대중 음악 산업의 고찰-오케 레코드 사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대중문화예술대학원, 2004.
이영준, 『한국가요사 이야기』, 아름출판사, 1994년.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삼천리』
『별건곤』
이난영, 위키백과
두산백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잡지자료 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

주석

  1. "엘레지",『두산백과』online, 두산백과. 온라인 참조: "엘레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
  2.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3. 이영준, ⌜한국가요사 이야기⌟, 아름출판사, 1994년, p450
  4.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삼천리 제7권 제9호, 1935년 10월호
  5. 박도현, ⌜1930년대 레코드사 마케팅에 나타난 대중음악의 고찰⌟, 경희대학교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2011.
  6.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7. 춘계독자위안회 오-케-호화진용 당야출연예술가소개」, 『동아일보』, 1940.03.31. 5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8. 이난영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오케 회사와 태평회사의 암투는 ⌜레코드의 열광시대⌟, 『별건곤』 1933년 11월호에 상세하게 소개되었다.
  9. 여산,⌜인기가수의 예술・사생활・연애-화발풍다우의 이난영 양⌟, 『삼천리』, 삼천리사, 1935년 8월호
  10. <이천오백만의 감격>(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이난영 노래, 1943) 이난영이 남인수와 함께 노래한 <이천오백만의 감격>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남인수> 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 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 나라님 부르심을 감히 받들어 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후렴)<남인수·이난영>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2. <남인수> 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聖壽)를 빌고 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 미영(米英)의 묵은 원수 격멸의 마당 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후렴) <남인수·이난영>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3. <남인수> 喜べ榮あるこの朝(あした)皇尊(すめらみこと)の御民(みたみ)わ れ われら今日(きょう)より兵(へい)となり 行(ゆ)くぞ戰(いくさ)の海 (うみ)の果(は)て (후렴)<남인수·이난영> ああ誰(だれ)かここに進(す す)まざる ああ誰かここに進まざる
  11. 영화배우 유계선(劉桂仙)이 낭독한 대사와 이난영의 노래로 이루어진 <신춘엽서>의 일부 가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유계선 대사) 신춘엽서 아내가 전지로 떠나간 남편에게 보내는 새해 인사 별다른 부탁이 없다 별다른 맹세가 없다 이것은 이미 송별하던 정거장에서 흔들며 노래 하던 깃발속에 말없이 주고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직 ***를 보낸다는 아내의 심정 (이난영 노래) 묵은 해를 보내고 새 봄날 새 아침에/ 이 편지를 씁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애국*엔 따뜻한 정성으로/ ***를 보내오니 받으오소서
  12. 『오케가요극장』에 실린 노래들은 <신춘엽서>를 위시하여, <지원병의 어머니>, <강남의 나팔수>, <총후(銃後)의 자장가>, <아들의 혈서>, <목단강(牧丹江) 편지>의 총 6곡이다.
  13.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열녀비>의 3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꽃피는 하루 아침 떠나가신 대장부여/ 나라에 바치신 몸 못 오시는 그날도/ 열녀비 썩는 고개 손을 들어 기다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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