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조선
개요
김능인 감독의 <노래조선>[2]은
1936년 오케(Okeh)레코드가 경성촬영소와 협업하여 제작,
1936년 4월 15일 조선극장에서 개봉[3],
오케레코드 전속 가수 일행의 일본 오사카 공연 장면과 국내에서 촬영된 코믹 춘향전을 편집하여[4]만든
조선 최초의 뮤지컬 영화이다.
내용
배경
- 레뷰
프랑스의 쇼 공연물인 ‘레뷰’ 는 1929년 5월 2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프랑스 무성영화 <몬 파리(La Revue des Revues)>(1927)[5]를 통해 소개 된 이래로 이미 1930년대 초반 조선 극장가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었다. 파리 고급 패션샵의 봉제공으로 일하는 여주인공이 레뷰 쇼의 댄서가 되는 꿈을 이루는 과정을 다룬 <몬 파리>는 당시 파리 최고의 뮤직홀인 물랭 루즈(Moulin Rouge),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s)의 레뷰 공연을 다이나믹하게 보여주었는데,[6] 특히 여자 무용수들이 펼치는 화려 한 군무(群舞)는 이후 조선의 거의 모든 극단 공연에서 차용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신파극단인 취성좌(聚星座)는 이 영화의 상영 직후인 1929년 6월부터 단성사에서 장기 공연하면서 희가극 레뷰극 <부세(浮 世)행진곡>(1막 7장, 신불출 원작) 등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고,[7] 같은 해 9월 조선극장에서는 자체적으로 ‘십여 명의 레뷰 걸’을 양성해 레뷰 단과 재즈 밴드를 조직하고 <경성야곡>(1장), <다란떼라>(1장), <야반(夜 半)의 체금>(1장), <북악산 톡기> 등을 공연했으며,[8] 이들 레뷰단과 밴 드는 11월 신극운동단체 토월회(土月會)의 제1회 부흥공연―악극 <초생달>(1막), 희가극 <질거운 인생>(1막)―에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9]
- <춘향전>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10]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은 음악/뮤지컬 영화가 아니었다. 물론 음악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배경음악으로 홍난파에 의한 양악(洋樂) 반주 에 부분적으로 조선악(朝鮮樂), 즉 아악(雅樂)이 삽입되었는데,[11] 안종화는 이에 대해 “음악 효과를 낸답시고 사용한 것이 우리나라 고전음악이 아닌 양악판(洋樂盤)이었으니, 그야말로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식의 초현대적인 영화”[12]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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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에서 박석고개 장면에 ‘농부가’를 집어넣으려 했으나 경비문제 로 그만두었다. 레코드로 한 떠불에 취입한 노래를 필름으로 집어넣으려면 필름대만 6, 70원이 걸린다. 그 돈이 없어서(없다느니보다도 경영자의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 당연) 그대로 넘어가고, 또 그때에는 녹음기와 촬영기를 접속시키는 동시 모터가 아직 안 나와서 동시녹음을 못하고 할 수 없이 아프 레코(after record)를 하게 되어 그 고심이 적지 않았다. 또 아프 레코에도 녹음기가 노이즈리스(noiseless) 시스템이 아니었으므로 잡음이 굉장히 많았다. 출연배우들의 고심은 말할 것도 없다. 동시 모터가 촬영 중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처음이므로 무서워서 손을 못 대었다. 아프 레코 할 때에도 녹음기가 직선식(直線式)이 아니고 복식(卜式, カブリシヤイナ)으로 컴마 이하를 사용하게 되므로 높은 소리만 들어가고 낮은 소리는 죽어버리므로 배우들은 목소리에 퍽 부자연한 것을 피치 못하였다. 목소리가 부자연한 데다가 아프 레코로 입과 말이 맞지 않았으니, 처음 발성영화로 큰 실패를 하였다[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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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이명우,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춘향전>을 제작할 때>, ≪조선영화≫ 제1호(1936년 10월) | ||
- 한계
당시 조선 영화산업의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음악/뮤지컬 영화의 제작은 요원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1930년 12월 13일 극우 야쿠자이자 경성 흥행계의 실력자였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원산(遠山)프로덕션으로 개소한 경성촬영소는 <춘향전> 직전까지도 <대도전>(김소봉, 1935), <홍길동전>(김소봉⋅이명우, 1935) 같은 무성영화를 만들던,[14] 무성영화 제작 시스템에 맞춰진 제작사였고, 조선영화 기술의 선구자 이필우가 1930년 무렵부터[15]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매진해 개발했다는 토키 시스템 ‘조선폰’도 사실 일본인 녹음기사 나카가와 다카시(中 川堯史)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기계를 개조한 것이었다[16]
참고문헌
주석
- ↑ 「오케영화제작소의 노래조선」, 『조선일보』, 1936.04.19. 6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안재석(2019)에 따르면 지금까지 김상진 혹은 김상진과 김능팔이 공동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신문기사(≪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14일자 3면 ; ≪동아일보≫ 1936년 4월 17일자 3면)에는 <노래조선>의 감독⋅구성이 김능인(金陵人)으로 소개되어 있다. 김능인(1911∼1937)은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 ‘휘파람’ 등의 작사가로, 1936년까지 오케레코드의 초대 문예부장을 지내다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성영화 <종소리>(1929), <방아타령>(1931)의 감독 김상진이 오케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오케그랜드쇼단의 기획 일을 본 것은 김능인이 퇴직한 이후이며, 김능팔은 ‘金陵人’의 오독(誤讀)이다.
- ↑ 「전발성음악영화 노래조선 조선극장 상영」, 『동아일보』, 1936.04.17.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노래조선> 기본정보/줄거리」,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nline , 한국영상자료원. - ↑ 만춘창작평 삼 =문예적시평과기타수제=
- ↑ 백현미, 「어트랙션의 몽타주와 모더니티 – 1920년대 경성의 레뷰와 가극을 중심으로」, 『한 국극예술연구』 제32집, 2010, p88
- ↑ 백현미, 앞의 논문, p93.
- ↑ 백현미, 앞의 논문, p93.
- ↑ 최승연, 「악극 성립에 관한 연구」, 『어문논집』 제49집, 2004, p411.
- ↑ 춘향전
- ↑ 이명우,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춘향전>을 제작할 때>, ≪조선영화≫ 제1호(1936년 10월)(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편저, 『조선영화란 하(何)오: 근대 영화비평의 역사』, 창비, 2016, 336쪽에서 재인용)
- ↑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p227.
- ↑ 이명우, 앞의 글 (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편저, 앞의 책, 336∼337쪽에서 재인용).
- ↑ 정종화, 「‘경성촬영소’의 설립과 전기(前期) 제작 활동 연구」, 『영화연구』 제79호, 2019, 42∼43, p59.
- ↑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유장산⋅이경순⋅이창근⋅이필우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p264∼265.
- ↑ 정종화, 「식민지 조선의 발성영화 상영에 대한 역사적 연구」, 『영화연구』 제59호, 2014, p324∼325.
기여
- KJG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