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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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조선>


조선 최초의 뮤지컬 영화


기사 속 <노래조선> 사진, 1936.04.19. 조선일보 6면[1]


개요

김능인 감독의 <노래조선>[2]
1936년 오케(Okeh)레코드가 경성촬영소와 협업하여 제작,
1936년 4월 15일 조선극장에서 개봉[3],
오케레코드 전속 가수 일행의 일본 오사카 공연 장면과 국내에서 촬영된 코믹 춘향전을 편집하여[4]만든
조선 최초의 뮤지컬 영화이다.

내용

뮤지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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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는 토키(talkie), 즉 발성(發聲)영화가 도입되면서 탄생한 장르이다. 무성영화 시대에도 라이브 음악(노래)을 수반한 상영방식과 특별한 눈요깃거리로서의 춤 장면이 삽입된 작품들이 다수 있었고, <카르멘(Carmen)>(1915),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1925) 같은 오페라(opera)나 <메리 위도우(The Merry Widow)>(1925) 같은 대중적인 페레타(operetta)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도 만들어졌지만,[5] 뮤지컬 영화 장르의 형성은 1920년대 후반 사운드 트랙(sound track) 녹음기술의 성공적인 도입으로 인해 가능해졌다.
세계 최초의 발성영화이자 뮤지컬 영화인 <재즈 싱어(The Jazz Singer)>(1927)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앞다투어 음악(노래)과 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1930년대 초반까지 만 150여 편(1929년에 55편, 1930년에 77편, 1931년에 11편, 1932년에 10편)에 이르는 뮤지컬 영화가 제작되었고[6] 1933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장르로서의 틀을 갖추고 1930∼194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더욱이 뮤지컬 영화는 할리우드만의 장르가 아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는 물론 일본, 중국, 인도, 심지어 멕시코나 이집트, 터키 같은 국가에서도 자국만의 뮤지컬 영화 전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조선의 발성영화 시대는 뮤지컬 영화의 시대가 아니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도 발성영화가 대중 상영되기 시작했고 1935년에는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도 만들어졌지만, 뮤지컬 영화는 상영에서도 제작에서도 주류 장르로 정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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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재석,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82』, 2019.


배경


  • 레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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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쇼 공연물인 ‘레뷰’ 는 1929년 5월 2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프랑스 무성영화 <몬 파리(La Revue des Revues)>(1927)[7]를 통해 소개 된 이래로 이미 1930년대 초반 조선 극장가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었다. 파리 고급 패션샵의 봉제공으로 일하는 여주인공이 레뷰 쇼의 댄서가 되는 꿈을 이루는 과정을 다룬 <몬 파리>는 당시 파리 최고의 뮤직홀인 물랭 루즈(Moulin Rouge),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s)의 레뷰 공연을 다이나믹하게 보여주었는데,[8] 특히 여자 무용수들이 펼치는 화려 한 군무(群舞)는 이후 조선의 거의 모든 극단 공연에서 차용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신파극단인 취성좌(聚星座)는 이 영화의 상영 직후인 1929년 6월부터 단성사에서 장기 공연하면서 희가극 레뷰극 <부세(浮 世)행진곡>(1막 7장, 신불출 원작) 등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고,[9] 같은 해 9월 조선극장에서는 자체적으로 ‘십여 명의 레뷰 걸’을 양성해 레뷰 단과 재즈 밴드를 조직하고 <경성야곡>(1장), <다란떼라>(1장), <야반(夜 半)의 체금>(1장), <북악산 톡기> 등을 공연했으며,[10] 이들 레뷰단과 밴 드는 11월 신극운동단체 토월회(土月會)의 제1회 부흥공연―악극 <초생달>(1막), 희가극 <질거운 인생>(1막)―에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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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도현, 「1930년대 레코드사 마케팅에 나타난 대중음악의 고찰」, 경희대학교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2011, p5



  • <춘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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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12]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은 음악/뮤지컬 영화가 아니었다. 물론 음악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배경음악으로 홍난파에 의한 양악(洋樂) 반주 에 부분적으로 조선악(朝鮮樂), 즉 아악(雅樂)이 삽입되었는데,[13] 안종화는 이에 대해 “음악 효과를 낸답시고 사용한 것이 우리나라 고전음악이 아닌 양악판(洋樂盤)이었으니, 그야말로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식의 초현대적인 영화”[14]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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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재석,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8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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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에서 박석고개 장면에 ‘농부가’를 집어넣으려 했으나 경비문제 로 그만두었다. 레코드로 한 떠불에 취입한 노래를 필름으로 집어넣으려면 필름대만 6, 70원이 걸린다. 그 돈이 없어서(없다느니보다도 경영자의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 당연) 그대로 넘어가고, 또 그때에는 녹음기와 촬영기를 접속시키는 동시 모터가 아직 안 나와서 동시녹음을 못하고 할 수 없이 아프 레코(after record)를 하게 되어 그 고심이 적지 않았다. 또 아프 레코에도 녹음기가 노이즈리스(noiseless) 시스템이 아니었으므로 잡음이 굉장히 많았다. 출연배우들의 고심은 말할 것도 없다. 동시 모터가 촬영 중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처음이므로 무서워서 손을 못 대었다. 아프 레코 할 때에도 녹음기가 직선식(直線式)이 아니고 복식(卜式, カブリシヤイナ)으로 컴마 이하를 사용하게 되므로 높은 소리만 들어가고 낮은 소리는 죽어버리므로 배우들은 목소리에 퍽 부자연한 것을 피치 못하였다. 목소리가 부자연한 데다가 아프 레코로 입과 말이 맞지 않았으니, 처음 발성영화로 큰 실패를 하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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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명우,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춘향전>을 제작할 때>, ≪조선영화≫ 제1호(1936년 10월)


  •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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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영화산업의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음악/뮤지컬 영화의 제작은 요원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1930년 12월 13일 극우 야쿠자이자 경성 흥행계의 실력자였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원산(遠山)프로덕션으로 개소한 경성촬영소는 <춘향전> 직전까지도 <대도전>(김소봉, 1935), <홍길동전>(김소봉⋅이명우, 1935) 같은 무성영화를 만들던,[16] 무성영화 제작 시스템에 맞춰진 제작사였고, 조선영화 기술의 선구자 이필우가 1930년 무렵부터[17]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매진해 개발했다는 토키 시스템 ‘조선폰’도 사실 일본인 녹음기사 나카가와 다카시(中 川堯史)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기계를 개조한 것이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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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재석,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82』, 2019.



<노래조선>


<노래조선> 전단광고, [19]


<노래조선> 크레딧[20]
담당 이름
감독 김상진
출연 임생원
이난영
나품심
강남향
고복수
김해송
임방울
전경희
원작 김상진
각본 김상진
제작자 분도주차랑(일본)
기획 분도주차랑(일본)
촬영 이명우
편집 이명우
현상 이명우
제작사 오케레코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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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4월 15일 조선극장에서 개봉한[21] <노래조선>(전7권)은 그동안 오케레코드 전속 가수 일행의 일본 오사카 공연 장면과 국내에서 촬영된 코믹 춘향전이 편집된[22]영화이다. 오케레코드사는 설립과 동시에 오케연주회와 오케재즈밴드라는 레뷰단을 조직하여 경성, 부산, 목포, 개성, 평양, 원산 등의 전 조선 흥행을 거쳐, 1936년부터는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나고야 등지의 동포를 대상으로 한 일본 공연을 시작했는데 <노래조선>은 바로 이 오케연주회와 오케재즈밴드의 첫 번째 일본 공연(‘재류조선인동포위안 오케-순회대연주회’)을 준비하던 차에 기획되었다.[23]
“OK레코드의 무대 공연을 필름에 담는 데 지나지 않”[24]은, “토키를 이용해서 대중음악을 선전하자는 상업주의의도 하에 만들어진 최초의 음악영화”[25]로 알려져 왔다.하지만 이 영화는 단지 공연 장면을 촬영해 편집한 편찬(compilation)/기록 영화가 아니라 오케연주회와 오케재즈밴드의 ‘도쿄’ 공연 장면과 희가극 <춘향전> 을 서사상의 연결 없이 함께 묶어놓은 레뷰 뮤지컬 영화였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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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재석,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8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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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래 조선>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하나가 1936년 2월부터 3월까지 진행된 오케연주단의 일본 공연 영상이다. 공연 실황을 그대로 찍은 것이 영화적 완성도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점이 있겠으나, 이철에게는 그 문제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았던 듯하다. 그의 음악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라기보다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당시 조선에서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는 공연을 누구보다도 잘 기획할 수 있는 그였기에 가능한 입장이기도 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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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준희, 「이준희의 영화사산책 ① - 미완의 음악영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참고문헌

Rick Altman, ⌜Film/Genre⌟,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1999
배리 랭포드, 방혜진 역,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 한나래, 2010
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편저, 『조선영화란 하(何)오: 근대 영화비평의역사』, 창비, 2016.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황문평, 『한국 대중 연예사』, 부루칸모로, 1989.
백현미, 「어트랙션의 몽타주와 모더니티 – 1920년대 경성의 레뷰와 가극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제32집, 2010.
정종화, 「‘경성촬영소’의 설립과 전기(前期) 제작 활동 연구」, 『영화연구』 제79호, 2019.
정종화, 「식민지 조선의 발성영화 상영에 대한 역사적 연구」, 『영화연구』 제59호, 2014.
최승연, 「악극 성립에 관한 연구」, 『어문논집』 제49집, 2004.
이명우,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춘향전>을 제작할 때>, 『조선영화』 제1호(1936년 10월).
이영일, 『한국영화전사(개정증보판)』, 도서출판 소도, 2004.
유현목, 『유현목의 한국영화발달사』, 책누리, 1997.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유장산⋅이경순⋅이창근⋅이필우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www.kmdb.or.kr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newslibrary.naver.com
『동아일보』
『조선일보』

주석

  1. 오케영화제작소의 노래조선」, 『조선일보』, 1936.04.19. 6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2. 안재석(2019)에 따르면 지금까지 김상진 혹은 김상진과 김능팔이 공동 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신문기사(≪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14일자 3면 ; ≪동아일보≫ 1936년 4월 17일자 3면)에는 <노래조선>의 감독⋅구성이 김능인(金陵人)으로 소개되어 있다. 김능인(1911∼1937)은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 ‘휘파람’ 등의 작사가로, 1936년까지 오케레코드의 초대 문예부장을 지내다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성영화 <종소리>(1929), <방아타령>(1931)의 감독 김상진이 오케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오케그랜드쇼단의 기획 일을 본 것은 김능인이 퇴직한 이후이며, 김능팔은 ‘金陵人’의 오독(誤讀)이다.
  3. 전발성음악영화 노래조선 조선극장 상영」, 『동아일보』, 1936.04.17.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4. <노래조선> 기본정보/줄거리」,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online, 한국영상자료원.
  5. 배리 랭포드, 방혜진 역, 『영화 장르: 할리우드와 그 너머』, 한나래, 2010, p144∼145.
  6. Rick Altman, ⌜Film/Genre⌟,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1999, p32.
  7. 만춘창작평 삼 =문예적시평과기타수제= 『조선일보』, 1929.04.25.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8. 백현미, 「어트랙션의 몽타주와 모더니티 – 1920년대 경성의 레뷰와 가극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제32집, 2010, p88
  9. 백현미, 앞의 논문, p93.
  10. 백현미, 앞의 논문, p93.
  11. 최승연, 「악극 성립에 관한 연구」, 『어문논집』 제49집, 2004, p411.
  12. 춘향전 『동아일보』, 1935.10.04. 2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3. 이명우,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춘향전>을 제작할 때>, ≪조선영화≫ 제1호(1936년 10월)(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편저, 『조선영화란 하(何)오: 근대 영화비평의 역사』, 창비, 2016, 336쪽에서 재인용)
  14.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98, p227.
  15. 이명우, 앞의 글 (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편저, 앞의 책, 336∼337쪽에서 재인용).
  16. 정종화, 「‘경성촬영소’의 설립과 전기(前期) 제작 활동 연구」, 『영화연구』 제79호, 2019, 42∼43, p59.
  17.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유장산⋅이경순⋅이창근⋅이필우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p264∼265.
  18. 정종화, 「식민지 조선의 발성영화 상영에 대한 역사적 연구」, 『영화연구』 제59호, 2014, p324∼325.
  19. 전발성 음락영화 노래조선」, 『조선일보』, 1936.04.15. 7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20. 노래조선,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한국영상진흥원
  21. 전발성음악영화 노래조선 조선극장상영」, 『동아일보』, 1936.04.17.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22. <노래조선> 기본정보/줄거리,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한국영상진흥원
  23. 오케—사십여명예술가 동경대판등지 로음락행각」, 『조선일보』, 1936.02.05. 6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1936년 2월 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들의 출국 기사에는 고복수, 이난영, 김연월, 강남향, 임생원, 나품심, 한정옥, 김해송, 임방울, 신숙 등 가수극부원과 최호영, 염석정, 이경주, 손목인, 송희선 등 음악부원 40여 명이 일본 내지로 음악 행각을 떠났는데, “겸(兼)하야 동경(東京)에 서는 모영화회사(某映畫會社)와의 계약(契約)으로 조선음악영화(朝鮮音樂映畫)를 촬영(撮影)한다”고 밝히고 있다.
  24. 이영일, 『한국영화전사(개정증보판)』, 도서출판 소도, 2004, p177
  25. 유현목, 『유현목의 한국영화발달사』, 책누리, 1997, p212.
  26. 안재석,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뮤지컬 영화 수용 양상 연구」, 『영화연구』 제82호, 2019, p265
  27. 이준희의 영화사산책 ① - 미완의 음악영화,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한국영상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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