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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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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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최수봉에 대한 문서이다. 최수봉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였으며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 경찰을 살상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내용

출생과 학적

  • 1894년:

최수봉은 1894년 3월 3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영화 암살에서는 조승우가 연기한 김원봉의 첫 대사가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였는데, 김원봉을 비롯하여 의열단 창단 멤버 중 상당 수가 밀양 출신[1]이었다. 그의 학생 시절 일화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최수봉이 김원봉과 함께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닐 적에 한 일본인 교사 단군이 스사노 오노미코토의 아우라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그는 단군과 스사노의 생존연대를 추적했고 둘의 시간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말 시험에서 그는 스사노가 단군의 중현손이라고 답했고 그것을 빌미로 퇴학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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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무라 오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시각으로 이 학교는 폐교되었다. 학도들은 즉시 귀가하라.”
전홍표 교장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학교의 학도들아, 잊지마라. 이 학교에서 배운 정신을!"
학생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때 최수봉이 앞으로 나아가며 벽력같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동화의 학우들이여, 울지 말자! 눈물은 약한 자의 것, 실패한 자의 것이다!”
김원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모두 일어나 세 분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자. 그리고 오늘은 잊지 말자고 엄숙히 다짐하며 <학도가>를 부르자.”
두 학년이 합반인데다 책상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어 교실이 비좁았지만 학생들은 스승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세 사람의 스승은 두루마기 깃을 여미며 학생들의 절을 받았다. 학생들의 <학도가>를 부르며 교실을 나가면서 동화학교는 일제에 의해서 폐쇄되었다. 밀양지역은 ‘의열투쟁의 메카’이다 황상규․김대지를 막후로 하여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그 중심이었다. 특히 전홍표가 대한제국 초기 군관청에 설립한 동화학교는 김원봉․윤세주․최수봉 등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밀양지역은 밀양강과 낙동강의 의해 충적된 비옥한 토지 때문에 개항 이후 낙동강과 경부선을 통한 일본인들의 내륙 진출이 러․일전쟁 이전부터 추진된 지역이다. 대규모의 일본인 농촌이민이 추진되는 등 일본인 식민회사와 대지주의 토지 침탈이 이른 시기부터 가속화되었던 곳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밀양강과 낙동강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수리시설을 토대로 대규모 토지를 경영하였다. 경부선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가곡동에 일본인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점차 삼문동을 거쳐 밀양강을 넘어 밀양 읍내까지 영역이 확장되었다. 밀양지역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내륙 물류 거점지역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밀양 읍내에는 일본인 회사, 상점 등이 진출하고 있었다. 경남에서 일본인거류지가 있었던 부산과 마산을 제외한 내륙지역 중 통영, 진주, 밀양에 일본인 진출이 가장 많았던 점도 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이른 시기 밀양지역에서 철도역을 중심으로 농촌지역으로 진출했으며 점차 읍내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인과 갈등이 생겼다. 그 결과 밀양지역에서도 3․1운동이 대대적이고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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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열단의 요람, 동화학교 터[2]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화학교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동학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단체인 연무단을 조직하였으며 의열단 조직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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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공보 퇴학 이후:

이후 1910년 동화학교에 편입, 1912년 명정학교[3] 입학, 1913년 숭실학교[4] 등을 거쳤고 이후엔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광부일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

  • 1919년:

1919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밀양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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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이듬해 1920년, 김상윤[5]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최수봉은 무장폭력을 통한 독립 쟁취를 노선으로 삼던 의열단의 뜻에 동의하여 폭탄 2개를 제조했다. 12월 26일 저녁에는 다른 의열단원인 이종암과 모의하여 다음날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것을 결심했다.
12월 27일 오전 9시 40분, 밀양 경찰서장 와타나베가 순경들에게 교육을 하던 중 창문 너머로 폭탄이 날아왔다. 그리고 이어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지만 위력이 약했던 나머지 사상자, 상해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폭탄을 던진 이후 최수봉은 인근 민가에 들어가 식칼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순사들은 그를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고, 몇 주간의 치료 끝에 회복했다. 더 자세한 경과는 이 문서

최후

  • 1921년:

2월 3일, 부산 지법에서 도주의 이유를 묻는 재판장에 말에 최수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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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정말 목적을 달성했으면 즉시 자결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네놈들에게 욕을 보지도 않을 텐데, 일이 그렇게 안 되어버렸으니 어찌 운명이라 하지 않겠는가? 세계 대세나 동양 대국상(大局上)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행동은 조선 국민 된 자의 당연한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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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문화편지[6]


라고 응수하였고 이에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7]. 이후에도 몇 차례 재판이 이어지며 상고재판까지 가게 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최수봉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7월 8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해방된 지 한참이 지난 1963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최수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과연 실패한 의거인가

표면상으로 어떤 상해나 사망자도 없었고 약간의 건물 손괴만이 일어났을 뿐이므로 그의 행적에 큰 의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변혁은 모든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을때 일어난다. 비록 일제의 심장부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의 용감한 행동은 후배 의열단원들과 식민지 백성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일제 항복의 직접적인 원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리틀보이와 팻 맨이었지만 독립을 염원한 개인 또는 단체의 노력도 높게 평가해야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사건을 신문으로 접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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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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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8]


라고 극찬하였고 김구에게 다방면의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향년 27세로 짧은 삶을 살다 간 최수봉 의사의 이야기는 비록 어떤 일이 실패했을지라도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참고문헌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 2015.
정은경, 「약산과 의열단」, 『열린정신 인문학연구』제20집 제2호(통권 제35호), KCI, 2019.08, 27쪽.
| 의열단의 요람, 동화학교 터online, 온바오.
| 98년 전 오늘 최수봉 의사 경찰서에 폭탄 던져online, 우리문화신문.
| 장제스 감동시킨 김구, 국제연맹 설득한 이승만… 일제를 압박하다online, 조선일보.

주석

  1. 창단 멤버 13인 중 5명이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
  2. http://www.onbao.com/dbria/sub.html?cd_com=3125537
  3. 부산 범어사에서 운영
  4. 윤동주가 다녔던 그 숭실학교이다.
  5. 같은 밀양 출신이며 동화학교 동문이다.
  6. http://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16258
  7. “조선역사를 알지 못하는 음모 선인(鮮人)으로 독립을 망상하고 죽음을 결단하였으니 사형에 처하는 것이 지당함”
  8.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3/2019042303721.html

기여

* 이수현: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