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폭탄투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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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최수봉

[1]


1920년 12월 27일 의열단원 최수봉(崔壽鳳)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무장독립운동이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경과를 다루어보려 한다.

내용

최수봉

최수봉은 1894년 3월 3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남면 마산원동(현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에서 태어났다.[2]이명은 최경학(崔敬鶴)이고, 1910년 사립 동화학교에 편입학[3]하였고, 1912년에는 부산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에 입학했다.[4]1913년 명정학교를 자퇴하고 평양으로 가서 미국 북장로교 계통의 중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지만, 거기서도 4년 과정 중 3년만 다니고 중퇴했다.[5] 그 후 1916년 음력 5월경 평북 창성군으로 가서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사금광에서 1년 간 광부 노릇을 했으며, 정주에서는 집배원으로 일했다.[6] 1919년 밀양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가하였고[7],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있던 그는 1920년 11월 김상윤과 만나 독립운동에 진력할 것을 권유받고 승낙해 의열단에 가입했다.[8]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수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9]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10]
최수봉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어린 시절 서로 좋은 동무였고[11] , 의열단의 제1차 계획이 발각되기 전, 의열단 동지에게서 폭탄제조법을 배웠다고 한다.[12]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배경


  • 밀양경찰서
지도를 불러오는 중...



의열단의 제1차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많은 의열단 단원들이 일제의 손에 잡히어[13]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이에 최수봉은 매우 분노하였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끓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의열단원 박재혁이 동지들의 복수를 위하여 부산경찰서를 습격하고, 부산경찰서 서장에게 폭탄 세례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14], 밀양경찰서 서장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15]고 생각한다. 의열단 1차 계획 발각 이전 배워둔 폭탄제조법으로 그는 집안 사람들까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폭탄을 제조[16]했고, 마침내 큰 폭탄 하나와 작은 폭탄 하나를 만드는 것에 성공[17]한다. 최수봉은 폭탄이 준비된 이후 기회를 노리다[18] 독립운동을 결행하기에 이른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경과


날짜
장소
활동
1920년 12월 27일(오전 9시 30분경)
밀양경찰서 최수봉은 먼저 서장의 훈시를 듣기 위하여 서원들이 모여 있던 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창문 밖에서 폭탄 1개를 던졌다.[19] 첫 번째 폭탄은 순사부장의 어깨에 맞고 탁자 위에 떨어졌으나 불발되었다.[20]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이어서 현관 쪽에서 폭탄을 복도 쪽으로 던졌다.[21] 이 두 번째 폭탄은 폭발하였으나 일경들 가운데 특별한 사상자는 없었다. 폭탄을 던진 최수봉은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아 붙잡히고 말았다.[22]



최수봉은 도망갈 마음은 없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23] 그는 몸을 빼내어 뛰었고, 순경들은 그를 추격했다.[24] 따돌리지 못함을 알고 최수봉은 단도를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25] 그러나 자결하지 못하고 일제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26]
대구지방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언도하였으나, 해당 사건을 맡았던 검사가 이를 가볍다 여겨 공소하였고, 대구복심법원은 최수봉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27]
1921년 7월 8일 최수봉은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28] 그는 교수대 앞에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형을 받아 13분 만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29]

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 관련 자료


판결사건일속[判決事件一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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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밀양폭탄사건
밀양적경찰서에 폭탄을 투하엿다는 사건으로 적에게 잡혀 제일심판결을 불복하고 공소하엿던 최경학은 지난 사월십륙일 대구의 적복심법원에서 사형의 판결을 밧엇더라.

<원문>
▷密陽爆彈事件
密陽敵警察署에 爆彈을 投하엿다는 事件으로 敵에게 잡혀 第一審判決을 不服하고 控訴하엿던 崔敬鶴은 지난 四月十六日 大邱의 敵覆審法院에서 死刑의 判決을 밧엇더라.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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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105호(1921년 5월 7일 발행), 「判決事件一束」


본국통신[本國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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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밀양서투탄사건
작년 십일월경 밀양적서에 폭탄을 투하엿다는 동군상남면마산리사는 최경학씨는 대구적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의 판결밧은 것을 검사가 다시 공소하야 대구적복심법원에서 사형의 선고를 한 바 차를 불복하고 상고하엿더니 지난 오월이십삼일 경성적고등법원에서는 동상고기각의 판결을 언도하엿더라.
<원문>

▷密陽署投彈事件
昨年 十一月頃 密陽敵署에 爆彈을 投하엿다는 同郡上南面馬山里사는 崔敬鶴氏는 大邱敵地方法院에서 無期懲役의 判決밧은 것을 檢事가 다시 控訴하야 大邱敵覆審法院에서 死刑의 宣告를 한 바 此를 不服하고 上告하엿더니 지난 五月二十三日 京城敵高等法院에서는 同上告棄却의 判決을 言渡하엿더라.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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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110호(1921년 8월 15일 발행), 「本國通信」


최경학의 호기[崔敬鶴의 豪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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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낭일밀양적경서에 폭탄을 투하고 적에게 피포한 최경학(이십구) 군에 대한 소위공판을 지난 삼일 오전 십시 부산적지방법원에서 개하엿는대 최군은 사실 전부를 시인하고 적재판장의 소문에 대하야 「세계의 대세나 동양대국상 조선의 독립은 가능할 뿐 외라 여사한 행동은 조선국민된 자의 당연히 할 의무」라고 호어하다.
적검사는 사형을 구형하먜 군은 태연한 안색으로써 왈 「가」라 하엿는대 판결은 십일에 하겟다고.


<원문>
曩日密陽敵警署에 爆彈을 投하고 敵에게 被捕한 崔敬鶴(二十九) 君에 對한 所謂公判을 지난 三日 午前 十時 釜山敵地方法院에서 開하엿는대 崔君은 事實 全部를 是認하고 敵裁判長의 所問에 對하야 「世界의 大勢나 東洋大局上 朝鮮의 獨立은 可能할 뿐 外라 如斯한 行動은 朝鮮國民된 者의 當然히 할 義務」라고 豪語하다.
敵檢事는 死刑을 求刑하먜 君은 泰然한 顔色으로써 曰 「可」라 하엿는대 判決은 十日에 하겟다고.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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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94호(1921년 2월 17일 발행), 「崔敬鶴의 豪氣」


참고문헌

주석

  1.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2.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3.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4.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5.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6.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7.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8.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9.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10.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11.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5
  12.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7
  13.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6
  14.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6
  15.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6
  16.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7
  17.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7
  18.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7
  19.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0.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1.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2.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3.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7
  24.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8
  25.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8
  26.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8
  27.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58
  28.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29. "최수봉",『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30. 「判決事件一束」, 『독립신문』제 105호, 1921년 5월 7일,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online, 독립기념관.
  31. 「本國通信」, 『독립신문』제 110호, 1921년 8월 15일,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online, 독립기념관.
  32. 「崔敬鶴의 豪氣」, 『독립신문』제 94호, 1921년 2월 17일,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online,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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