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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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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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으로 활동한 박재혁에 대한 문서이다. 박재혁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였으며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를 사살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내용

출생과 학적

박재혁은 1895년 5월 17일 부산 동구에서 출생했다.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던 그는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상업학교[1]에 입학하였다. 박재혁은 학창시절부터 반일운동단체를 결성하여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 오택 등과 함께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배포하거나 비밀결사단체 구세단을 조직하는 등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2].

독립운동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20세 시작했다.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며 자금을 모은 그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거를 진행했다.
1920년 초, 진영사건[3]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부산 경찰서에 잡혀 고문, 투옥되자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의 암살을 계획한다. 그리고 1920년 9월 14일, 고서 상인으로 변장한 박재혁은 부산 경찰서에서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면회를 요청했고, 평소 고서에 관심이 많던 슈헤이는 면회를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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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은 하시모토 슈헤이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고 하시모토 슈헤이한테 고서를 주다가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 단원이다. 너희가 이미 우리들한테 몹쓸 짓을 한 것을 알고 왔다!"라 말하고 하시모토 슈해이의 죄를 열거한 후 폭탄을 하시모토 슈헤이한테 투척했다. 폭탄이 터지자 두 사람은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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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그 결과, 하시모토 슈헤이는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하게 되었고 박재혁은 중상을 입게 되었다. 사건의 더 자세한 경과는 이 문서로.
해당 문서에는 의거 전 박재혁 의사의 상세한 행적이 서술되어있다. 상하이에 있던 박재혁은 나가사키로 이동했고 다시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최후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1년 3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대구형무소에서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불나방 같은 삶

의열단 멤버들은 늘 품 속에 의열단의 행동강령과 같던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넣어놓고 힘들때마다 그것을 읽으며 용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들은 말 그대로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불로 뛰어는 나방은 결국 죽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용기있게 뛰어든 불나방의 수많은 희생으로 불은 소화됐다. 박재혁 의사도 그러한 불나방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28」, 『오마이뉴스』, 2021년.4월.9일. 『오마이뉴스』online, 오마이뉴스.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501004000039 進永(진영) 殺人事件(살인사건) 第一回(제일회) 公判(공판), 『부산일보』, 1950년.10월.4일.(2면) 『부산일보』online, 부산일보.
"박재혁", 『위키백과』online, 위키백과.
독립운동의 터전 상하이」, 『오마이뉴스』, 2021년.4월.9일. 『오마이뉴스』online, 오마이뉴스.
일제강점기 부산경찰서 자리에 박재혁 의사 활약 새겼다」, 『노컷뉴스』, 2021년.4월.9일. 『노컷뉴스』online, 노컷뉴스.

주석

기여

* 이수현: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