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찰폭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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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박재혁

[1]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이다.[2]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암살을 계획하였다.[3]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을 바탕으로 부산경찰폭사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다루어보려 한다.

내용

박재혁

1895년 5월 18일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태어나 1921년 5월 27일 사망하였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 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생시절부터 반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4]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崔天澤), 오택(吳澤) 등과 함께 일제에 의해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고,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5]20세 시절에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재혁은 경상북도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6]고,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 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7]
대구형무소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12년 7월 14일 부산 동구청에서는 그의 생가가 있는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거리로 명명하였다.[8]

박태원의『약산과 의열단』을 통해 본 박재혁 독립운동

부산 경찰폭사사건 배경


의열단의 1차 계획 실패 이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의열단원 대부분이 검거당한 부산경찰서에 대해 복수하고자 했다. 김원봉은 당시 무역상인으로 싱가포르에 있었던 박재혁에게 전보를 쳐서 상해로 불렀다. 박재혁이 김원봉의 전보에 상해로 달려온 것은 의열단 공약 10조 중 7조에 의한 것이었다.

의열단의 「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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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함.[9]
5. 의백(義伯[편주 : 의열단의 우두머리])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편주 :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10]
9.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11]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處殺)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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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34



전보를 받은 박재혁은 상해로 달려왔고, 김원봉은 그에게 부산 경찰서장을 죽이고 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부산경찰서장에게 대한 김원봉의 지극한 분노와 지극한 증오는 그냥 단순히 그 목숨을 빼앗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12] 한 가지 명을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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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되오. 제가 누구 손에 무슨 까닭으로 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알도록, 단단히 수죄(數罪)를 한 다음에 죽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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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49



김원봉은 후에 이 한마디 말이 혹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동지를 죽인 것이 아닌가 하고 초연해 하였다고 한다. [13]

의열단이 암살하고자 했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는 고서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이용하여 박재혁은 중국 고서를 이유로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중국 고서를 가득 담은 가방에 폭탄을 감추어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자 한 것이다.

부산 경찰폭사사건 경과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에 기록된 것을 정리한 것임.

날짜
장소
활동
1920년 9월 초
중국 상해 중국 고서를 사들였다.
1920년 9월 초
일본 장기(나가사키) 일본 수선(輸船)을 타고 황해를 건너서 일본 나가사끼로 이동했다.
원래 계획은 일본 장기에서 하관(下關)으로 가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건너오려 했지만, 장기에서 곧장 대마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배편을 알게 되어 계획을 변경하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환승을 해야 하므로 여러 번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대마도를 거쳐 오게 되면 비교적 덜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박재혁은 상해에 있는 동지들에게 바뀐 계획에 대한 서신을 보냈다.
1920년 9월 13일(저녁)
부산 박재혁 본가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에는 박재혁의 본가가 있어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아침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에 찾아가 서장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서장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2층 서장실 2층에 있는 서장실에서 작은 탁자를 두고 박재혁과 경찰서장이 마주 앉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자신이 가져온 중국 고서를 구경시켜준 다음 봇짐을 풀었다. 밑에 숨겨두었던 폭탄과 전단이 드러났고, 박재혁은 전단을 서장을 향해 던진 후 유창한 일어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상해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말을 마친 후 폭탄을 탁자 한가운데에 두었고,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1920년 9월 14일
부산경찰서 유치장 사람들이 박재혁을 유치장에 가두었다. 박재혁은 몸에 중상을 입었었다.
1920년 9월 14일 이후
잡힌 그 첫날부터 박재혁은 단식을 결행하였다. 혹독한 심문에도 그는 입을 봉하고 응하지 않았고, 밥풀 한 알, 물 한 모금을 입에 넣지 않고 잡힌 지 아흐레 만에 목숨을 끊었다.



  • 피해와 경과


이름
피해 정도
경과
박재혁
몸에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꼼짝을 못하고 있었음. 경찰서 사람들이 유치장에 가둠.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
선혈이 마룻바닥에 퍼져있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음. 한쪽 다리가 폭탄으로 인해 끊어져 있었음. 응급처치하고 병원으로 이송하여 갔지만, 곧 사망하였음.



박재혁 부산경찰폭사사건 관련 자료


부산적서에 투탄사건 박재혁사형언도[釜山敵署에 投彈事件 朴載爀死刑言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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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작년 부산적경찰서에 폭탄을 투하야 적의 서장을 살해하려 하엿다는 박재혁군은 저간 일이심의 판결을 불복하고 상고하엿더니 적의 고등법원에서는 원판결을 취소하고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지난 삼십일일에 언도하엿더라.

<원문>
昨年 釜山敵警察署에 爆彈을 投하야 敵의 署長을 殺害하려 하엿다는 朴載爀君은 這間 一二審의 判決을 不服하고 上告하엿더니 敵의 高等法院에서는 原判決을 取消하고 死刑에 處한다는 判決을 지난 三十一日에 言渡하엿더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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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102호(1921년 4월 9일 발행), 「釜山敵署에 投彈事件 朴載爀死刑言渡」





참고문헌

주석

  1. "박재혁",『나무위키』online, 위키피디아.
  2.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3.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4.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5.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6.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7.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8. "박재혁",『위키백과』online, 위키피디아.
  9. 동지를 애호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자는 뜻임.
  10. 수명을 온전히 마치자는 관념을 타파하려는 것임.
  11. 개인이 아니면 전체를 이룰 수 없고, 전체를 떠나서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12.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49
  13.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49
  14. 「釜山敵署에 投彈事件 朴載爀死刑言渡」, 『독립신문』제 102호, 1921년 4월 9일,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online,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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