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공장(京工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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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관부에 소속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제작하던 일은 전업으로 하던 장인.

개설

경공장(京工匠)은 서울에 거주하고 그들의 명단을 쓴 장적(匠籍)이 한성부에 등록되어 있는 데다가, 관청에 소속되어 있어 관공장(官工匠)·관장(官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경공장은 전업적인 관청 수공업자란 의미로 조선시대부터 쓰인 용어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초기에는 국방을 위한 무기를 제조하거나 궁궐이나 관청을 짓기 위해, 나라가 안정되는 성종대 이후에는 중국에 보낼 조공품이나 왕의 복식 등에 필요한 제품을 제작하기 위해 그것을 제작하는 장인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르면 공조(工曹)·병조(兵曹)·이조(吏曹) 산하의 30개 아문에서 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초기의 경공장 제도는 16세기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숙종대부터 18세기 중엽 영조대까지 경공장은 공조·상의원(尙衣院)·내수사(內需司) 등의 관청에 소속되어 관장제가 실시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상공업의 발달과 경제활동의 활성화가 이루어졌고, 장인들의 사적인 생산이 증가하면서 관서에 소속되어 부역하는 것보다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이득이어서 상인들과 이권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19세기에 국가나 왕실에 필요한 물품의 제작 또한 경공장 대신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이 제작하는 제품을 구입하는 방향으로 대체되었다.

신분

경공장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양인(良人)이나 관노비(官奴婢), 사노비(私奴婢), 사원노비(寺院奴婢), 승려(僧侶) 등으로 구성되었다가 점차 양인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첫째, 사원노비이다. 조선초기 1415년(태종 15)에 8만여 명이나 되는 사원노비 중 일부가 공장화되었다(『태종실록』 15년 8월 29일). 1425년(세종 7)에 각도에 산재한 1,000명의 사원노비를 선공감 예하의 봉족직(奉足職)을 주어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세종실록』 7년 1월 19일).

둘째, 관노비이다. 각 관사에 소속된 노비로서 금박장(金箔匠)·연금장(鍊金匠)·나전장(螺鈿匠)·필장(筆匠)·화장(靴匠) 등 왕실용 세공품을 제작하는 데 기술이 뛰어난 숙련공들은 공장직에 편입시켰다(『세종실록』 7년 4월 28일).

셋째, 선상노비(選上奴婢)이다. 지방관아에서 서울로 뽑혀 올라가, 관청의 관노로 편성되어 각사의 일을 도맡아 하다가 장인이 되었다.

넷째, 승려 중에서도 공장에 편입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6년 3월 8일). 다섯째, 일반 양인으로서 공장에 편입되었다. 이 경우 천인(賤人)으로서 속량(屬良)된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었다.

이처럼 공천(公賤)과 함께 양인도 공장에 편입됨에 따라 공장의 등록도 공조와 그 소속 관아 이외에 공천 출신은 형조에서, 양인 출신은 병조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초기의 경공장은 양인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사노비는 공장의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면 장인 제도가 무너지면서 양인 신분의 경공장의 동원이 어려웠다. 이에 모든 공장은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거주지를 기록하여 관부의 역사에 응할 수 있도록 공장 등록을 강조하였다.

조선후기 17세기 말 18세기 후반까지 활동한 경공장도 대부분 양인이었다. 다만 19세기에 들어 천인 중 도감에서 장기간 국역을 졌던 장인의 우두머리인 변수(邊首)들 중 스스로 원하면 천인을 면하도록[自願免賤] 해주었다.

담당 직무

경공장은 공조·병조·이조 산하 30개 관청에 129종 2,795명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 관서의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은 수요품을 제작하는 신역(身役)을 졌다. 첫째, 공조는 산하에 선공감을 두었고, 장인들은 궁궐이나 성곽 등의 영선 업무를 주관하였다. 둘째, 상의원·제용감(濟用監)·내수사·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 등의 장인은 왕의 복식이나 왕실에서 사용할 공예품을 제작하였다. 셋째, 군기시(軍器寺) 소속의 장인은 무기와 병장기 등을 제작하였다. 넷째, 교서관(校書館)의 장인은 서책을 제작하는 역할을 하였다. 다섯째, 사옹원(司饔院)에는 장인 전원이 사기장 380명으로 소속되어 왕실의 각종 기명을 제작하였다. 여섯째, 조지서(造紙署)에는 지장 80명이 소속되어 조공용이나 국가용 종이를 제작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관청 제도를 거의 그대로 따르되 각 관서는 공조·병조·이조 산하의 관청으로 통합하였다. 고려시대의 관노비를 비롯하여 사원노비나 사노비 및 선상노를 흡수하여 조선시대 관청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의 종류와 수는 대폭 확대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중앙 관청 중 공장을 둔 곳은 30개소였고 직종은 129종, 인원은 2,795명이었다.

조선초기 정부는 이러한 경공장을 감독하기 위해 제한된 인원에게 관직을 주고 녹봉을 주었다. 그들 중 취재에 합격하고 제조품이 우수하며 제작 경험이 많은 자에게는 종7품 이하의 체아직(遞兒職)을 준 것이다. 일부는 소정의 녹봉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나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장인은 보수 없이 1년에 2, 3교대로 관청에서 일하고, 그 외에 공장세를 납부하는 대신 서울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사적으로 제작한 생활용품을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16세기부터 장인에 대한 녹봉, 체아직 수직, 식비의 지급 등의 규정이 지켜지지 않고, 이들에 대한 수취가 가혹해져 경공장들의 피역과 이탈이 가속되었다. 이에 처음에는 결원을 양인과 노비에서 보충하다가 나중에는 군대, 보솔(步率), 한역(閑役), 관속(官屬) 등에서 기술이 없는 자라도 보충하여 기술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방식은 수공업자의 기술 저하를 초래했으므로 연산군 때부터 민간 수공업자를 고용하는 방식을 채택해 실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경공장 제도가 무너지고 장적 또한 사라져 17세기 초에는 왕실의 행사나 국역에 서울에 거주하는 수공업자들을 부역에 징발하거나 포(布)를 납부하는 장인가포제(匠人價布制)를 시행했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숙종대부터 장인들의 명단을 장적에 올리고 공조·상의원·내수사 등의 관청 내 관장을 두거나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 등 군문에 장인을 소속시키는 경공장 제도가 일시 부활하였다. 하지만 18세기 말 정조대부터 광산 개발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관청에 장인을 예속시키는 장적법(匠籍法)은 해체되었다. 이후 19세기에는 국역이나 왕실의 행사 등에도 경공장 대신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들에게 품값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만길,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한길사, 1984.
  • 송찬식, 『이조 후기 수공업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 유교성, 『한국 상공업사』, 한국문화사대계 2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 김신웅, 「조선시대의 경공장과 외공장의 관계」, 『산업경제연구』 12권 1호, 1989.
  • 이청일, 「한국 전통 수공업의 역사적 배경」, 『동국지리』 6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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