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박장(金箔匠)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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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금박장 |
한글표제 | 금박장 |
한자표제 | 金箔匠 |
상위어 | 경공장(京工匠) |
관련어 | 니금(泥金), 도다익장(都多益匠), 부금(付金), 첩금(貼金)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이민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박장(金箔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24년 4월 27일, 『세종실록』 7년 4월 28일 |
공조(工曹) 와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금을 두드리거나 납작하게 눌러 아주 얇게 금편을 만드는 장인.
개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부록인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을 보면, ‘금을 두드려 눌러 납작하게 만든 것으로 종이보다 얇아서 금박(金箔) 또는 금박(金薄)’이라고 하였으니 금을 종이와 같이 얇게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을 일컬어 금박장(金箔匠)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박은 그림을 그릴 때 니금(泥金)을 하거나 화금(畵金)을 할 때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금박 종이를 붙여 첩금(貼金)을 하는 데 사용한다. 금박장은 우선 좋은 금박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취련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였으며,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장인은 스스로 좋은 금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금박의 용도를 보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246년 기록에 “관곽(棺槨)에 금박하는 일을 금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관에 금박을 붙였음을 알 수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대가섭(大伽葉)이 금박으로 고불(古佛)을 치장하여 광채가 나게 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자마금박(紫磨金薄)으로 주불(主佛) 미륵여래(彌勒如來)와 보처(補處)인 두 보살(菩薩)의 상을 개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금박이 불상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금박을 붙이는 첩금과 함께 부금(付金)을 뜻한다. 이 역시 금박을 붙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금박을 이용한 공예 기술이다.
이 외에 1310년에는 장경(藏經)을 베껴 쓰도록 황태후가 금박 60여 정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문선』에는 금박을 사들여 가장 존귀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베끼게 하니 글자마다 금 빛깔이 흐르고 정각(正覺)이 밝게 비추어 물결마다 달 모양을 안았다고도 하였다. 또 1749년(영조 25)에는 위판을 금박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어 금박이 글씨를 쓰는 데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금박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사용되었는데 복식(服飾)이나 관의(官衣) 등에 금박을 올려 금문을 표현하였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에는 중궁전의 법복인 적의에 꿩을 그렸으며, 하피(霞帔)·면사(面紗) 등에도 금박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금에 이용되었다. 또한 1629년(인조 7) 관무재에 거둥할 때 대전과 세자궁이 입는 곤룡포에 붙이는 보(補)에 무늬를 그려 넣을 때에도 소용되었다.
이와 같이 금박은 글씨를 쓰는 데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데까지 다양하게 이용되었으며, 금박을 만드는 일은 금박장이 담당하였으나 금박과 관련된 일은 도다익장(都多益匠)이나 부금장(付金匠) 등의 전문 장인이 별도로 있어 금박과 관련된 세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담당 직무
금박장의 주된 직무는 얇은 금박을 만드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금박장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금박을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493년(성종 24) 성절사의 행차에 금박장을 중국으로 보내는데 이때 금을 가지고 가서 취련하는 방법을 배워 오도록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조에 함녕군(咸寧君)이 금은의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금을 가지고 가면 조선에서 금이 생산되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조공을 바쳐야 할 수도 있으므로 금을 가지고 중국에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중국 대신 금을 잘 사용하는 왜인들에게 취련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일본과의 교류를 중국이 탐탁해하지 않으므로 주저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장인으로 하여금 취련케 한다 하더라도 조종조로부터 지금까지 국용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금박을 만들고 정제하는 기법인 취련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24년 4월 27일). 이처럼 금박장의 역할은 금박을 만들고 취련하는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변천
고려시대 이전에는 금박과 관련된 별도의 관직이나 관서는 보이지 않으며, 『고려사(高麗史)』에 금박장은 장야서(掌冶署)에 소속되어 있으며, 행수교위 1명, 행수대장 1명 등 2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1년에 300일 이상 근무하고 녹봉으로 벼 12섬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총 6명의 금박장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경공장(京工匠)으로, 그중 2명은 공조(工曹)에 4명은 상의원(尙衣院)에 각각 소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경공장은 양민이고 공천이고 별호의 사천이고 간에 신분에 관계없이 재주 있는 사람으로 충당하였으나 1425년(세종 7)에는 관청의 노비로 견습생을 두었다가 결원이 생기면 숫자를 채우는 것으로 법식(法式)을 삼았다(『세종실록』 7년 4월 28일).
그러나 근대에는 금박을 기계로 만들면서 금박장의 역할은 축소 내지 단절되고 도다익장이나 부금장의 역할만 남게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문선(東文選)』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심연옥·이채원, 『금박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