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익현(沈益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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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1년(인조 19)~1683년(숙종 9) = 43세].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孝宗)의 딸 숙명공주(淑明公主)의 남편으로 부마(駙馬)이자 서예가. 자는 가회(可晦)이며, 호는 죽오(竹塢)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심지원(沈之源)이고,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윤종지(尹宗之)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심설(沈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심종침(沈宗忱)이다. 숙명공주와의 혼인으로 1650년(효종 1)에 청평위(靑平尉)에 봉해졌다.

효종~숙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10세 때 효종의 부마로 뽑혀 효종의 둘째 딸인 숙명공주와 혼인을 하여 명덕대부(明德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청평위의 봉작을 받았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3년 5월 3일] 1657년(효종 8) 사간원(司諫院)에서 심익현(沈益顯) 집의 종이 능풍군(綾豊君)구인기(具仁墍)의 집에서 난동을 부린 일을 지적하며 심익현을 추고할 것을 주장하였다.[『효종실록』효종 8년 7월 11일] 그러나 구인기 집의 종이 심익현의 세력에 겁을 먹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아 문제를 제기한 대관(臺官)이 오히려 추고를 당하였다.[『효종실록』효종 8년 8월 13일] 한편 심익현은 효종 대에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차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였고, 효종 만년에는 내섬시(內贍寺)제조(提調)를 지냈다.[『서하집(西河集)』 권14 「청평위심공묘지명(靑平尉沈公墓誌銘)」 이하 「심익현묘지명」으로 약칭]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에 심익현은 1661년(현종 2) 광덕대부(光德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그 뒤 여러 번 승진을 거듭하여 유록대부(緌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2년 윤7월 1일, 「심익현묘지명」] 1666년(현종 7)에는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의 연경(燕京)을 다녀오기도 하였다.[『현종실록』현종 6년 12월 1일, 현종 7년 2월 14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6년 12월 1일]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서법(書法)이 좋다는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을 받아 심익현이 지문(誌文)을 썼다.[『현종실록』현종 15년 5월 1일, 현종 15년 6월 27일, 『현종개수실록』현종 15년 5월 1일] 또한 1671년(현종 12)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는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예식을 총괄하였다.[『현종실록』현종 12년 3월 8일, 현종 12년 3월 22일]

심익현은 숙종 대인 1674년(숙종 즉위년)과 1680년(숙종 6)에도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청나라를 다녀왔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즉위년 8월 24일, 숙종 6년 6월 10일, 숙종 6년 윤8월 20일] 1683년(숙종 9) 6월에 미질(微疾)을 얻어 수일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숙종이 의원을 보냈음에도 결국 그해 7월 6일에 향년 43세로 세상을 떠났다.[『숙종실록』숙종 9년 7월 6일, 「심익현묘지명」]

한편 심익현은 서예에 뛰어나서 산릉지(山陵志)와 옥책문(玉冊文), 교명(敎命) 등의 글을 많이 썼는데, 특히 촉체(蜀體)에 능하였다.[「심익현묘지명」]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인경왕후익릉표(仁敬王后翼陵表)」, 「효종영릉표(孝宗寧陵表)」, 「우의정장유비(右議政張維碑)」, 「영의정이경여비(領議政李敬輿碑)」, 「경림군이정표(慶林君李淀表)」, 「좌승지송시철비(左承旨宋時喆碑)」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심익현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총명하여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외우기를 잘하였는데, 6세 때 처음으로 진(晉)나라 때 도잠(陶潛)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배운 뒤에 저물 무렵의 구름[暮雲]과 잠자러 오는 새[宿鳥]를 보게 되면 “암혈(巖穴)에서 구름이 나오고 새는 고달프게 날아간다.”는 말을 지적해 인식하였고 말할 때마다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심익현묘지명」]

그는 성품의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별세하고 나서 외조모를 섬기기를 어머니를 섬기듯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선대의 산업을 나누어 모두 형과 아우에게 사양하고 취한 바가 없었다. 또한 하사받은 노비도 다시 나누어주며 말하기를, “임금이 주신 복을 함께 누리자.” 하였다. 여러 차례 사신을 다녀오면서 받은 금과 비단 등의 하사품 역시 모두 수행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많은 이들에게 청렴하다는 칭송을 받았다.[「심익현묘지명」]

효종이 모든 사위들을 대접하기를 한 집안 사람같이 했지만 특히 심익현을 총애하여 금원(禁苑)에서 놀이를 할 때는 매번 그에게 따르도록 명하여 빈번하게 어제품(御製品)을 내리어 화답하는 시를 짓게 하고는 하사하는 것이 많았다. 식견과 사려가 신중하여 일을 당하면 민첩했으므로 부마가 된 후 항상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대궐의 일을 보살피곤 하였는데, 효종이 승하했을 때도 효종 상례와 관련한 모든 일들을 그가 주관하였다.[「심익현묘지명」] 인선왕후 역시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필한(筆翰)에 공교(工巧)하다 하여 그를 매우 아꼈다.[『숙종실록』숙종 9년 7월 6일]

묘소와 후손

심익현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으며, 이민서(李敏叙)가 남긴 묘지명이 있다.

부인은 효종의 둘째 딸 숙명공주이며, 자식은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심정보(沈廷輔), 차남은 심정협(沈廷恊)이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81 「영릉지문(寧陵誌文)」]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서하집(西河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관재집(靜觀齋集)』
  • 『조선금석문총람(朝鮮金石文總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