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紗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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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문무백관이 단령(團領) 관복(官服)에 사용하였던 관리용 관모.

개설

사모는 조선시대 관리들이 단령 관복인 상복(常服) 또는 시복(時服)에 사용하였던 관모이다. 19세기 후반에는 공복용 관모로도 사용하였다. 형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모자인데 그 틀에 얇은 검은색 비단으로 싸고 뒤쪽에 1쌍의 뿔을 좌우로 꽂았다. 시대에 따라 모자의 높낮이가 변화하였으며 뿔 역시 너비와 길이, 꽂혀진 방향, 굴린 정도 등이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국상(國喪) 중에는 흰색 옷감으로 싼 백사모(白紗帽)를 사용하였으며 혼례 때는 신분에 관계없이 신랑이 단령에 사모를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흔히 신랑의 초례청 혼례복을 사모관대(紗帽冠帶)라고 하였다.

날씨가 추워져서 국왕이 익선관에 이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신하들도 사모에 사모이엄(紗帽耳掩)이라고 하는 난모(煖帽)를 함께 사용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10월 초하루부터 1월 말까지 사모에 난모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사모는 고려말인 1387년(고려 우왕 13) 6월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명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1품에서 9품까지 단령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초기, 관리들에게 궐내나 조로(朝路)에서 사모를 쓰도록 명한 것을 볼 때 사모의 착용이 보편화되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1396년(태조 5)에는 백관에게 상시 사모를 쓰고 매일 궐문에서 시위하게 하였으며(『태조실록』 5년 6월 11일), 1417년(태종 17) 12월에도 다시 관리들에게 비와 눈이 오지 않으면 항상 사모를 쓰도록 함으로써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태종실록』 17년 12월 20일).

대한제국 시기에 서양식 관복으로 제도를 변경하면서 제도상으로는 사라지게 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왕실 의례에서는 여전히 단령의 관모로 사모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93년(고종 30) 의화군(義和君) 혼례에서 공복을 착용하는 경우 본래 사용하던 복두 대신 사모를 사용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형태

사모의 형태는 뒷면이 높고 앞은 낮은 이층 구조를 지녔다. 뒷면 아래쪽에는 좌우 수평으로 타원형의 뿔이 꽂히게 된다. 조선초기에는 대체로 ‘당제(唐制)’니 ‘당체(唐體)’니 하여 중국 명나라의 사모 형태를 기본으로 삼았다. 1449년(세종 31)에는 종친(宗親)과 부마(駙馬), 문무 2품 이상에게 중국 제도의 사모를 하사함으로써 중국 사모 형태를 따르도록 하였다. 선조 때는 대체로 사모의 높이가 높았으며 광해군대 이후 다시 낮아졌다가 차츰 높아져서 다시 숙종 때 이후 정조 때까지 높은 형태를 유지하였다. 이후로 다시 점차 낮아졌다.

사모는 죽사(竹絲)로 곱게 짠 2단의 모자 틀 위에 사(紗)와 같은 검정색의 얇은 비단을 발라서 만들었으며 뒤쪽 하단부에 1쌍의 사모뿔을 꽂았다. 국왕이나 왕세자의 익선관과 기본 모자 틀의 형태는 같지만 뒤쪽 하단에 꽂은 뿔의 방향에 차이가 있었다. 신하의 사모뿔은 수평으로 꽂은 반면에 국왕과 왕세자의 익선관 뿔은 하늘을 향하도록 수직으로 꽂았다.

조선초기의 사모뿔은 옷감만으로 부드럽게 만든 연각(軟角)이었으나, 점차 빳빳한 테를 둘러 만든 타원형의 경각(硬角)으로 변화되었다. 1454년(단종 2)~1455년(세조 1)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신숙주(申叔舟)의 초상화에서는 가늘고 길게 사선으로 뻗쳤던 사모의 뿔이 1467년(세조 13) 적개공신(敵愾功臣) 손소(孫昭)나 장말손(張末孫)의 초상화에는 타원형의 뿔이 수평으로 꽂힌 사모가 보인다. 모자 부분과 사모뿔의 세부적인 형태는 시대마다 변화가 있었지만, 수평으로 꽂혀진 뿔은 이후 사모가 사용되는 동안에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사모뿔의 무늬로 품계를 구분하였는데, 『속대전(續大典)』에는 당상 3품 이상은 무늬 있는 뿔[紋紗角]을, 그리고 당하 3품 이하는 단사각(單紗角)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모뿔의 무늬로 당상관과 당하관을 구분하였던 것이다.

용도

사모는 단령이라고 하는 관복에 함께 사용하는 관모이므로 기본적으로 관리의 모자이다. 국상 중에는 사모 위에 거친 베를 싸서 만든 소색의 포과사모(布裹紗帽)를 쓰기도 하였는데 이를 흔히 백사모(白紗帽)라고도 부른다. 일반 사모와는 달리, 백사모의 뿔은 연각이었으나, 1730년(영조 6)에 이르러서는 경각(硬角)을 사용하게 되었다. 대상(大祥) 후에는 다시 평상시 사모를 사용하는데, 흔히 오사모(烏紗帽)로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 남자들의 관례(冠禮) 시 초가(初加) 때의 관모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혼인을 하는 신랑의 관모로도 사용되었다. 혼례 때는 관직이 없는 신랑이라도 섭성(攝盛)이라고 하여 신분을 초월하여 1품의 옷을 입을 수 있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규제가 있었으나 초례(醮禮)를 치를 때 사모와 단령을 착용할 수 있었다.

한편 사모는 수의용 관모로도 사용되었다.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경우는 흔히 복건(幅巾)을 사용하였지만, 단령을 수의로 사용하는 경우는 사모를 사용하였다. 이때는 흔히 검은 비단(帽段)으로 간단히 만들어 실제 사모를 대신해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영조대의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의 경우처럼, 평소 사용하였던 사모를 수의용 관모로 사용한 사례도 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초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조선전기 면신례(免新禮)에 사용되는 기물 중의 하나로 기록되기도 했다. 당시 감찰에서는 새로 들어온 관리를 연못에 보내 사모로 물을 퍼 오도록 하여 옷을 더럽히도록 하였으며, 신임 관리의 집에 몰려가서 대접을 받을 때는 신임 관리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와 손님들을 맞이하는 등, 사모와 관련된 면신례 풍속이 전해지고 있다.

안동 지역의 근세 풍속 중에는 초례청의 신랑이 신부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모뿔을 뺐다고 하는데, 뿔을 빼는 것은 신부에게 소박을 놓아 소실로 삼겠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
  • 『속대전(續大典)』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傭齋叢話)』
  • 尹學準,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Ⅰ』, 길안사, 1994.
  • 이강칠 외,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 현암사, 2003
  • 이은주·조효숙·하명은, 『17세기의 무관 옷 이야기』, 민속원, 2005.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고문서집성』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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