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의(襲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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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습의 |
한글표제 | 습의 |
한자표제 | 襲衣 |
하위어 | 강사포(絳紗袍), 곤룡포(袞龍袍), 과두(裹肚), 답호(褡𧞤), 면류관(冕旒冠), 면복(冕服), 명목(幎目), 명의(明衣), 석(舃), 악수(幄手), 원유관(遠遊冠), 익선관(翼善冠), 철릭[帖裏] |
관련어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상례비요(喪禮備要)』, 습전(襲奠), 습제구(襲諸具), 염습(殮襲)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순종 |
집필자 | 이민주 |
용도 | 장례(葬禮) 제구(諸具)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습의(襲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3년 6월 28일, 『세조실록』 3년 9월 3일, 『영조실록』 52년 3월 5일 |
조선시대 왕이나 왕세자가 죽으면 목욕시킨 후 절차에 따라 입히는 제구(諸具).
개설
습의(襲衣)는 왕이나 왕세자의 시체를 씻은 뒤 입히는 명의(明衣) 위에 덧입는 습제구(襲諸具)이다. 『세종실록』 「오례(五禮)」 가운데 흉례 의식에 습의의 절차가 언급되어 있다. 먼저 내시(內侍)가 손을 씻고 습상(襲牀)을 휘장 안에 설치하고, 욕석(褥席) 및 베개[枕]를 편다. 다음으로 습의를 펴놓는데, 먼저 겉과 안을 흰색 비단[白羅]으로 하고 홍색과 녹색의 연을 두른 대대(大帶)를 펴놓는다. 다음으로 흉배에 용무늬를 짜 넣은 둥근 깃의 곤룡포(袞龍袍), 반비의(半臂衣)인 저사답호[紵絲褡], 철릭[帖裏], 나원령(羅圓領)을 각각 펴놓는다.
다음으로 홍저사원령(紅紵絲圓領), 답호[褡], 철릭, 백초 과두(裹肚), 백초 한삼(汗衫), 백초 바지[袴], 백초 버선[襪]을 입히는데, 백초 바지는 두 벌을 입히고 나머지는 모두 한 벌만 입힌다. 그 위에 9칭(稱)을 사용하되, 답호를 섞어서 했다. 의상은 모두 상의원(尙衣院)에서 만들어 올렸다.
또 함에 망건(網巾), 수관(首冠), 충이(充耳), 멱목(幎目), 악수(幄手), 신발 1쌍을 넣었다. 이때 망건은 조라(皂羅)로 대신하기도 하며, 수관은 나(羅)로 만들며 두의(頭衣)라고도 한다. 충이는 죽은 사람의 귀를 막기 위해 솜으로 만든 귀마개이며, 멱목은 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헝겊으로 청라(靑羅)를 쓰는데 안은 훈초(纁綃)를 사용한다. 길이 1자 2치, 너비 4치로 만들며 자초(紫綃)로 끈을 만들어 뒤에서 묶는다. 악수는 시체의 손을 싸는 헝겊으로 청라를 쓰는데, 안은 훈초를 사용한다. 길이 1자 2치, 너비 5치로 만들며 자초로 끈을 2개 만들어서 손바닥 뒤에서 묶는다. 신발은 붉은색으로, 만약 내상(內喪)이면 청리(靑履)로 모두 저사(苧紗)를 사용한다.
그것을 평상의 동북쪽에 두고, 목욕이 끝나 가면 내시가 상을 마주 들고 들어와 욕상의 서쪽에 두었다. 이때 내상이면 여관이 하였다. 그 위에 대행을 옮겨 놓고 곧 습을 하는데, 수건(首巾)·상복(上服)·이(履)는 입히거나 신기지 않고 이불을 덮는다. 내시는 욕상을 치우고, 대행을 상으로 옮겨 정 중앙에 놓은 뒤 머리를 남쪽으로 하고 곧 병풍과 휘장을 친다. 모두 소색을 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습의는 『세종실록』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만 대대의 경우 내상이면 겉과 안을 청라로 쓰고, 곤룡포가 아닌 장삼(長衫) 및 의(衣)·상(裳)·한삼으로 한다고 하여 내상의 경우를 추가하였다. 1680년(숙종 6) 10월 27일 대행왕비의 습례를 행하였는데, 『국조오례의』의 상의와 같이 하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숙종대까지 이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습의에서도 내시가 유장 안에 습상을 설치하고 손을 씻고 욕석과 베개를 깔아놓았다고 나와 있다. 먼저 옥대, 곤룡포, 저사답호, 철릭을 놓은 다음 나단령(羅團領), 답호, 철릭을 놓았고, 다음으로 홍저사원령, 답호, 철릭, 백생초(白生綃) 과두, 백생초 적삼, 백생초 단고(單袴) 두 벌, 백생초 말(襪)을 놓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습의 제도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1423년(세종 5)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가르쳐 준 중국의 습 제도를 보면, 천자(天子)는 12칭, 상공(上公)은 9칭, 제후는 7칭, 대부는 5칭, 사(士)는 3칭으로 했다. 소렴의(小斂衣)에 있어서는 천자로부터 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19칭이며, 대렴의(大斂衣)에 있어서는 천자는 120칭, 상공은 90칭, 제후와 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은 70칭, 대부는 50칭, 사는 30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정대왕 초상에는 습의가 7칭이었으며, 소렴의는 15칭, 대렴의는 38칭이었고,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초상에는 습의를 7칭, 소렴의는 19칭, 대렴의는 90칭으로 하였다.
1461년(세조 7)에는 습의를 18칭으로 하였으며, 대렴전(大斂奠)·소렴전(小斂奠)을 베풀었고, 1468년(예종 즉위)에는 모두 9칭을 사용하였다. 1593년(선조 26) 선릉·정릉 개장도감이 아뢴 염습에 쓰는 의대를 보면 선릉은 양위(兩位)이고 정릉은 단위(單位)인데, 매 위마다 습(襲)에 9칭, 소렴에 19칭, 대렴에 90칭이 필요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습의에 들어가는 옷의 가짓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00년(선조 33) 빈전도감에서 『국조오례의』를 상고해 본 결과, 국왕의 습에 쓰이는 의복이 9칭, 소렴은 19칭, 대렴은 90칭이라고 밝히면서 이 규정을 따르자고 건의하였다(『선조실록』 33년 6월 28일). 이때부터 국왕의 습은 9칭으로 대한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신분에 따른 습의 차이를 보면, 1457년(세조 3) 왕세자의 습에는 7칭을 쓰고 습전(襲奠)을 베풀었으며, 염(斂)에는 19칭을 쓰고 소렴전을 베풀었다(『세조실록』 3년 9월 3일). 1505년(연산군 11) 궁인의 상사(喪事)에는 습의로 3칭을 쓰게 하였다. 이로 보아 신분에 따라 습에 사용한 옷의 가짓수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76년(영조 52)의 실제 습의를 살펴보면, 집사(執事)가 먼저 습상(襲床) 위에 베개[枕]를 바치고, 그다음에 화옥대(畵玉帶)를 깔았다. 다음으로 다홍운문대단(多紅雲紋大緞)으로 된 곤룡포를 깔고, 그다음으로 초록금문(草綠金紋) 대단답호[大緞褡]를 깔았다. 그다음에 옥색공단(玉色貢緞) 장의(長衣)와 보라공단(甫羅貢緞) 장의(長衣), 운문유청대단(雲紋柳靑大緞) 중치막(中赤莫), 남공단(藍貢緞) 중치막(中赤莫), 자적향직(紫的鄕織) 중치막(中赤莫), 초록공단 중치막을 깔았으며, 다음에 유문백사(有紋白紗) 단삼(單衫)을 깔았는데, 모두 9칭이었다.
또 운문백사단고(雲紋白紗單袴), 백공단대고(白貢緞大袴)를 바쳤다. 다음으로 백공단으로 된 말을 바치고, 다음으로 남광직(藍廣織) 요대(腰帶), 남광직 각대자(脚帶子), 흑초(黑綃) 망건, 모단(毛緞) 조모(皁帽)의 순으로 바쳤다. 이어서 모단 익선관을 씌우고, 흑모단(黑毛緞) 화(靴), 남광직 토수(吐手), 모단 악수, 손톱과 발톱 치아와 머리카락을 넣은 주머니[剪爪及落齒髮囊]를 어상 위에 받들어 놓았으며, 집사가 멱모(幎帽)를 씌웠다(『영조실록』 52년 3월 5일).
또한 1919년(순종 12) 염습하는 제도에 대한 이왕직(李王職)의 문의에서 살펴보아도 염습하는 옷은 모두 익선관과 곤룡포를 사용하였고, 『국조상례보편』에도 역시 염습하는 옷에 관해서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 따라서 대한제국 말까지 국왕의 습의는 큰 변화 없이 익선관과 곤룡포였음을 알 수 있다.
형태
습의의 형태는 조선초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유사했다. 『국조상례보편』의 도설(圖說)을 통해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곤룡포는 평일에 입었던 것으로, 포는 육운문홍단을 사용하며, 별도로 홍단을 둥그렇게 잘라서 금선으로 오조룡을 직조하여 포의 가슴과 등, 좌우 어깨에 꿰매어 붙였다. 내상의 경우 팔운문아청단을 쓰고 사조룡을 직조하였다. 익선관은 종이에 풀을 먹여 각(殼)을 만들어 조모라(皂毛羅)로 싸고, 아청숙초로 대소를 싸서 각각 양각에 붙여 뒤에서 위로 향하게 하였다.
망건은 아청무문사(鴉靑無紋紗)를 사용하였고 위의 단에 자주색 갑사를 사용해서 주름을 잡았으며, 이은(泥銀)으로 쌍권자(雙圈子)를 그렸다. 일명 수관이라고도 하고 수파라고도 하는 두수는, 겉에는 모단을 쓰고 안쪽은 자주색 토주로 풀 먹인 종이를 쌌다. 두수의 길이는 바느질 자인 포백척(布帛尺)의 기준으로 길이가 1자 3치이고, 너비는 7치였다. 앞으로 3치를 구부리고 뒤로 1자를 늘어뜨려 접고, 앞의 굽은 곳의 좌우 양 모퉁이를 비스듬히 접어 각각 1치 5푼씩을 꿰매어 양 끝을 비게 한 뒤 그 가운데에 별도로 모단을 사용했다.
대의 너비는 1푼을 두르는데, 앞면에서부터 뒤에 사선으로 접혀진 부분까지 합해서 양 끝을 꿰맸다. 대는 두터운 종이로 띠[鞓]를 만들어 홍광직(紅廣織)으로 싸는데, 내상이면 남광직으로 쌌다. 모단으로 싸서 이은으로 띠돈[銙]을 그린 뒤 양 끝은 모단으로 맺었다. 화는 모단을 썼다. 백방주로 풀 먹인 종이를 싸고 위의 연(緣)은 녹광직으로 둘렀다. 갑정(甲精)은 백방주를 써서 안과 겉을 만들고, 연은 녹광직을 썼다.
말은 백숙초로 겉과 안을 하고, 신발인 석(舃)은 홍광직을 썼는데, 소상과 내상에는 모단을 썼다. 풀 먹인 종이를 백라(白羅)로 싸고 연은 모단으로 장식하고 홍록사로 만든 꽃 3개를 발등에 꿰매어 붙인다. 멱목은 겉은 모단을 쓰고 안은 홍광직을 썼는데, 크기는 사방 2치로 했다. 안을 솜으로 채우고 네 각은 모단을 매단다. 악수는 겉을 멱목과 같이 홍광직으로 싸는데, 길이가 1자 2치이고 너비가 5치이며, 가운데를 줄어들게 하였다. 아래 양 끝은 모단을 매달았다.
충이는 솜으로 만들어 썼는데, 대추씨 모양이다. 모[덮는 것]는 위쪽에는 질(質)이라 하여 현금단(玄錦緞)을 써서 손과 가지런하게 했고, 아래는 쇄(殺)라 하여 홍광직을 쓰고 이은으로 도끼를 그렸는데 길이는 3자이다. 한쪽 머리와 한쪽 가장자리를 이어서 꿰매고 붙였고, 나머지 한쪽 가장자리는 꿰매지 않고 위·아래에 자초로 만든 끈[紫綃帶]을 각각 7개씩 달았다.
절차
습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시자가 휘장 밖에 염습할 평상을 따로 설치하고 거적·돗자리·요·베개를 벌여 놓은 다음, 먼저 대대(大帶)·심의(深衣)·도포·장옷·한삼(汗衫)·바지·버선·늑백(勒帛)·과두 따위를 그 위에 올려놓는다. 드디어 들고 들어가서 목욕 평상의 서쪽에 놓고 시신을 그 위로 옮겨놓는데 다만 복건(幅巾)·심의·신[屨]은 착용시키지 않는다. 이때 옷은 입히되 섶이 모두 오른쪽으로 여며지도록 하며, 이불을 덮고 시자가 목욕 평상을 치운다.
만약 두 팔이 뒤틀려 소매를 꿸 수 없을 경우, 시신을 염습할 평상 위로 옮길 적에 시신의 허리가 바로 옷깃 위에 놓이도록 한 다음, 시신을 같이 위로 들어 올려 차츰차츰 내려놓으면서 손을 소매 속에 넣거나, 아니면 두 사람이 옷깃을 같이 잡고 시신의 하부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손을 소매 속에 넣기도 한다.
수의를 입히는 순서는 먼저 사자의 몸을 씻기고 진습의(陳襲衣)를 하는 것으로 사망한 당일에 행하는 절차이다. 제일 겉옷인 심의를 펴 놓고 중치막을 심의에 끼운다. 저고리에 적삼을 끼워 뒷고대와 좌우 소매 끝을 명주실로 꿰매어 놓는다. 바지 속에 속바지를 끼워 허리를 꿰맨다. 먼저 버선을 신기고 바지를 입힌 다음 허리띠를 매고 대님과 행전을 친다. 다음에 상의인 저고리와 중치막을 끼운 심의를 입힌다. 망건과 복건을 씌우고 충이로 귀를 막고 멱목으로 얼굴을 싸고 조대를 매고 습신을 신긴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시대 사대부의 수의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관직이 있으면 공복으로 하고 관직이 없으면 난삼(襴衫)·조삼(早衫)·심의로 한다고 하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습의 제도를 보면, 수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진열하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다시 돌려 진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습의의 구성은 복건 1개, 충이 2개, 망건 1개, 멱목 1개, 악수 2개, 심의 1벌, 단령 또는 답호나 직령의이고, 여자의 상(喪)인 경우 원삼이나 몽두의(蒙頭衣) 또는 장옷, 대대 1개, 한삼 1벌, 과두 1벌, 도포와 장옷은 있는 대로 많이도 쓰고 적게도 쓴다. 바지 1벌, 홑바지 1벌, 늑백 2개, 버선 2켤레, 신 2켤레, 모(冒) 1개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상례비요(喪禮備要)』
- 『주자가례(朱子家禮)』
- 김영숙,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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