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견선(歲遣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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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도항해 오는 무역선.

개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를 튼튼히 하는 한편 왜구에 대한 회유책과 강경책, 외교적인 교섭 등 다양한 왜구 대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1401년(태종 1)을 전후로 왜구는 줄어들었지만 일본에서 도항하는 통교자는 늘어났다. 특히 조선에서는 통교자들이 도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모든 접대 비용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재정적 부담은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조선 정부는 재정 부담을 줄이고자 대마도 정벌 이후부터는 포소(浦所)의 제한과 함께 서계(書契)·도서(圖書)·문인(文引)·세견선(歲遣船) 정약(定約) 등의 왜인 통제책을 실시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에 대마도에서는 조선시대의 세견선과 비슷한 성격의 진봉선(進奉船)을 매년 한 차례 2척씩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24년(세종 6) 회례사 박안신(朴安信)과 이예(李藝)가 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구주절도사원의준(源義俊)과 매년 봄가을에 각각 한 차례의 사신만 보낼 것을 약속함으로써 비로소 세견선의 정약이 이루어졌다. 1440년(세종 22)에는 안예주 미작태수 지평(持平)과 세견선을 정약하였다.

1443년(세종 25) 대마도주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세견선을 정약하였다. 계해약조 체결 시기와 과정에 대해서 종래에는 『해행총재』의 기록에 의거하여 1443년 파견되었던 통신사 정사 변효문(卞孝文), 부사 윤인, 서장관 신숙주(申叔舟) 일행이 체결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신숙주 졸기(卒記)와 『조선통교대기』·『보한재집』등의 사료를 종합해 보면, 계해약조는 1443년 8~10월경 대마도에 파견된 도체찰사 이예가 주도하여 체결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신숙주는 대마도주를 설득하여 약조를 체결하는 데 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해약조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전하여지는 것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세사미두를 하사한다는 것,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50척으로 정하고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세견선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파견할 수 있다는 것 등 2항목이었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주의 세견선과 세사미두에 대한 규정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이후 일본의 모든 통교자들에게 적용되었다. 1444년과 1445년에 종정성(宗貞盛)의 동생인 종언칠성국(宗彦七盛國: 7선)을 비롯하여 종성가(宗盛家)·종성홍(宗盛弘) 등 도주의 일족과 세견선을 정약하였고, 비전주(肥前州)의 원길(源吉), 석견주(石見州)의 등원화겸(藤原和兼)과도 세견선을 정약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수도서인(受圖書人)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계해약조 이후 세견선의 정약은 수도서인에 대한 통제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이 나이가 어려 대마도의 정세가 불안하였기 때문에 정수 외 세견선이 계속 증가하자 조선에서는 경차관(敬差官)원효연(元孝然)을 파견하여 세견선 수를 지키라고 대마도주에게 통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약자가 계속 증가하여 1455년(세조 1) 한 해 동안 도항한 왜인이 무려 6,116명에 이르렀다. 세조는 정수 외 세견선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한편 도주 특송선, 수직왜인선(受職倭人船)을 도주의 세견선 50척에 포함시키고, 심처왜(深處倭)의 사송선(使送船)을 1∼2척으로 제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 말기에는 정수 외 사송선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국내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1467년(세조 13)에 응인(應仁)의 난이 일어나 북구주가 분쟁의 장소가 되었고, 구주절도사의 세력이 쇠퇴한 상황이었다. 또한 대내씨(大內氏)의 구주 침입으로 대우전(大友殿)과 국지전(菊池殿)의 분열이 일어났고, 소이씨(小貳氏)가 싸움에서 패하여 대마도로 망명하였으며, 대마도에서는 종성직이 죽고 종정국(宗貞國)이 도주를 물려받아 문인(文引) 발급에 의한 왜인 통제에 어려움이 있었다.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1467년(세조 13)과 1468년에 관음(觀音) 현상이나 사리(舍利) 분신(分身)·을우화(雨花)의 출현을 축하하러 오는 사신이 무려 33건이나 되었으며, 1468년부터 1469년(예종 1)까지 대마도주가 접대를 요청한 경우가 무려 34건이나 되었다. 또한 1466년(세조 12)부터 1471년(성종 2)까지 수린호송(壽藺護送)이라 칭하여 접대를 허락받은 사례도 13건이나 되었다. 이처럼 세조 말부터 성종 초에 정수 외 사송선의 접대가 매우 광범위하게 행하여지고 있었다.

1470년(성종 1)에는 선위사전양민(田養民)을 대마도에 파견하였는데, 그가 가지고 간 사목(事目)에 심처왜의 세견선 정약자 37명의 명단을 기록하고 문인 발급에 신중을 기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후 세견선의 정약은 1471년 『해동제국기』 편찬 단계에 이르러서 체계화되었다. 1477년(성종 8)에는 수도서인도 세견선을 정약하여야만 조선에 내조하여 접대를 허락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세견선의 정약이 사송선의 통제 원칙으로 되었다. 이후 세견선을 정약하지 않은 자가 도서와 서계를 가지고 오는 경우에는 접대를 거부하는 등 불법 도항자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였으며, 이는 삼포왜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 기록된 세견선 정약자는 삼포왜란 이전까지 모두 68명이었다. 지역별로는 구주 지방이 35명으로 가장 많고, 대마 지방 20명, 일기 지방 8명, 본주(本州) 및 사국(四國) 지방 5명 순이었다. 그러나 세견선의 총수는 대마 지방이 다른 지방보다 훨씬 많았다. 세견선 정약자 중에 수도서인은 39명인 반면 수직인은 2명뿐이었다. 이는 세견선 정약과 도서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천

삼포왜란 후 맺은 1512년(중종 7)의 임신약조로 대마도주의 세견선이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되었고, 세견선 수도 임신약조 이후 210여 척에서 60여 척으로 크게 줄었다. 그 뒤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1523년(중종 18) 5척을 더하여 30척이 되었고,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으로 도항이 금지되었다가 1547년(명종 2)에 맺은 정미약조에서 25척으로 정하였다. 1557년(명종 12)의 정사약조로 다시 30척이 되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다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고,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를 맺어 심처왜의 통교는 모두 폐지되고, 세견선은 대마도주의 20척으로 한정하였으며, 그 밖에는 수직인선(受職人船)과 수도서인선(受圖書人船) 5척만을 허가하였다. 이후 대마도주는 조선과 교섭을 통해서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만송원송사(万松院送使)·아명송사(児名送使) 등 각종의 세견선을 정약하였다. 아명송사는 도주의 아들이 유명(幼名)으로 도서를 받아 사신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 후 조선은 접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유천(柳川) 사건을 계기로 1635년(인조 13) 도주 세견선을 겸대(兼帶)라는 형태로 통합하여, 최종적으로는 세견선을 1년에 8회 보낸다는 의미에서 연례팔송사(年例八送使)로 정리하였다. 세견선이 최종적으로 폐지된 시기는 일본의 폐번치현(廢藩置縣) 때인 1871년(고종 8)이었다.

의의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대마도주와 세견선을 정약한 이후 일본 지방의 통교자는 대마도주처럼 세견선을 정약하여야만 조선에 도항할 수 있었고, 1470년 심처왜의 세견선을 정약함으로써 세견선의 정약은 사송선의 통제 원칙이 되었다. 결국 계해약조로 대표되는 세견선의 정약은 조선시대 대일 외교 체제를 유지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또한 세견선의 정약은 조선후기까지 계속 유지되어 조선후기 대일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 『보한재집(保閑齋集)』
  • 『통문관지(通文館志)』
  •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
  • 『동문휘고(同文彙考)』
  •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5.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 -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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