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서(掌苑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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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의 정원 관리와 화초·과일나무 등을 재배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

개설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園]·화초 등을 관리하고 각 도에서 진상한 과일을 관리하던 관서이다. 904년(마진 무태 1) 궁예(弓裔)는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廣評省) 아래에 식화부 등 18부를 두었다. 고려시대에는 원원(園苑)을 관리하는 내원서(內園署)가 있었다. 1394년(태조 3) 동산색(東山色)상림원(上林園)으로 고치고 과실나무와 꽃, 새와 짐승을 장관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1446년(세조 12) 장원서로 개칭하였다. 1882년(고종 19)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46년(세조 12) 1월 세조가 중앙 및 지방의 통치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기존의 상림원을 장원서로 고치면서 장원 1명을 두게 하고, 원유(苑囿), 화초, 과실을 담당하게 하였다. 태봉 때의 식화부가 고려의 내원서로 바뀌고, 조선 건국 초에는 동산색·상림원이라고 불렀다. 상림원은 1405년(태종 5) 공조(工曹)의 속아문으로 편제되었다가, 1466년 1월에 장원서로 개정되었고 1882년 혁파하였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화초 등을 관리하고 각 도에서 진상한 과일 등의 관리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정6품 아문으로 원유, 화초, 과실의 관리를 관장한다고 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1원, 정6품 장원(掌苑) 1원, 정·종 6품 별제(別提) 3원을 둔다고 하였다. 잡직으로는 체아직인 별감(別監)은 20원이며, 그중 2원은 장번이고 재직 기간이 1800일이 되면 품계를 높이고, 종6품 실직에서 거관(去官)한다고 하였다. 액정서(掖庭署) 별감으로 임기가 차서 장원서로 옮겨온 자는 재직 기간이 900일이 되면 정7품을 주고, 다시 900일이 지나면 관직에서 떠난다고 하였다. 종6품 신화(慎花) 1원, 종7품 신과(愼果) 1원, 정8품 신금(愼禽) 1원, 종8품 부신금(副愼禽) 1원, 정9품 신수(愼獸) 3원, 종9품 부신수(副愼獸) 3원을 두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정6품 아문에서 종6품으로 바뀌었다. 정6품의 장원 1원과 별제 1원을 감하고, 종6품 별제가 2원이며, 종8품 봉사(奉事) 1원은 늘었다고 하였다. 잡직은 변화가 없다. 이속으로 서원(書員) 5인, 고직(庫直) 1인, 대청직(大廳直) 1인, 대청군사 1인, 사령(使令) 4인, 역인(役人) 12인 등이 있다.

1794년(정조 18)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원서등록(掌苑署謄錄)』에는 과원색(果園色)·노비색(奴婢色)·생과색(生果色)·건과색(乾果色)·작미색(作米色)·공방색(工房色)·장무색(掌務色)이 있었다.

먼저 과원색은 각종 원유 및 화과(花果) 등을 관장하였다. 성종대는 경복궁을 정비하면서 빈터에 과목(果木)·송백목(松柏木)·잡목(雜木)을 심고 관리하게 하였다. 창경궁으로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를 옮기면서 궁궐이 보이지 않도록 버드나무를 식재하였다. 또한 영산홍(暎山紅)과 매화(梅花) 화분을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연산군대는 특히 궁중 내에 각종 화초를 기르거나 옮겨 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왜척촉(倭躑蠋) 곧 철쭉을, 장의사동(藏義寺洞)에는 대나무[竹]를 심게 하였다. 그 외 치자(梔子)·유자(柚子)·석류(石榴)·동백(冬栢)·장미(薔薇) 등 각종 화초를 옮겨 심거나 장원서의 노비들로 하여금 화초 가꾸는 법을 익히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겨울에도 시금치[辛甘菜] 등 여러 가지 채소를 재배하기 위하여 장원서·사포서(司圃署)로 하여금 흙집을 쌓고 겨우내 기르게 하였다.

둘째, 과물(果物)의 조달 및 관리를 담당하는 생과색과 건과색이 있다. 생과색에서는 배, 밤, 은행, 홍시 등을, 건과색에서는 곶감, 호두, 잣, 대추 등을 조달 관리하였다. 종묘, 각 전 등에 사용되는 과일의 공급[供上], 생일 등 특별 진상[物膳進上], 내의원, 각 군영 등에 진상[進排]하는 과물을 담당하였다. 성종대 앵두[櫻桃]를 올린 기록이 보인다. 연산군대는 수박[西爪]을 바치거나, 또 홍시(紅柿) 및 언 게[凍蟹]를 생산되는 지방에서 올리게 하였다.

그 외 공납된 미곡을 담당하던 작미색, 장원서에서 소용되는 각종 기물(器物) 등을 관리하는 공방색, 기타 행사와 잡무를 담당하는 장무색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연산군대에는 경회루 못에 기르던 야생 기러기[野雁]를 일찍이 모화관 못으로 옮겨서 기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서의 성격상 여러 가지 과일이나 꽃, 분재 등을 진상하는 것은 장원서의 과원색의 일이었다. 분재나 꽃을 올리는 것은 왕의 성격에 따라서 달랐다. 성종은 인위적으로 가꾼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1471년(성종 2) 장원서에서 영산홍(暎山紅) 한 분(盆)을 올리자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이후에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매화를 올렸으나 왕은 바치지 못하게 하였다. 중종 역시 제철이 아닌 계절에 꽃을 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509년(중종 4) 입춘(立春)의 절화(節花)를 올리자 동지·입춘의 절화는 다만 대비전(大妃殿)에만 올리게 할 정도였다.

반면 연산군은 궁궐 꾸미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한성부(漢城府)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을 구해서 대궐 안 동산에 심게 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장원서 등으로 하여금 왜척촉을 찾아내어 흙이 붙은 채로 바치게 하였다. 이후 치자·유자·석류·동백·장미 등도 바치게 하였다. 장원서 관리들에게는 후원(後苑)에 꽃을 심게 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장원서 제조임숭재(任崇載)는 화초를 심는 노비가 적다고 하여 공노비에게 화초 심는 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궁궐 내에 나무를 심는 것이나 겨울철에 채소를 기를 수 있는 시설 관리 역시 장원서에서 담당하였다. 연산군대에는 시금치 등 여러 가지 채소를 장원서·사포서에서 흙집을 쌓고 겨우내 기르게 하였다. 이러한 흙집과 같은 시설은 세종 때 의관 전순의(全循義)가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농서를 참고하여 만들었다. 1552년(명종 7) 검토관왕희걸은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것은 흙집을 짓고 땔나무를 때야 해서 백성들이 많이 시달리므로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것을 보면 겨울철에 채소와 꽃을 기르는 일은 지속적으로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1506년 장원서 장원을 혁파하였다가 회복하였으나, 『속대전』 단계에서 이미 혁파되었다. 그리고 종6품의 별제가 실질적인 부서의 장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전회통』에서 종6품 아문으로 변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제조 1명을 늘리고 새로 종8품의 봉사 1명을 설치한 대신, 장원을 없애고 별제 1명을 감원하였다.

1882년(고종 19) 감생청(減省廳)에서 공상(供上)하는 관서(官署)를 정리하면서 어선(御膳)과 관련된 부서를사옹원(司饔院)으로 통괄하였다. 사도시(司䆃寺),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 사재감(司宰監), 의영고(義盈庫), 장원서, 사포서는 모두 혁파하였다. 제조는 감하며, 낭관들은 모두 호조에 소속시키며, 명칭은 원외랑이라고 하였다. 각종 공물은 사옹원에 바치게 하였고, 또한 장원서, 사포서 두 곳에서 관여하던 제향(祭享)의 물품도 봉상시에 이납(移納)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4: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4.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 연구』, 집문당, 2000.
  • 한복진,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전영옥·양병이, 「조선시대 조경행정기구로서 장원서의 기능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24권 4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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