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어영(統禦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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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충청·경기·황해도의 3도 수군을 통솔하던 통어사가 주둔한 수영(水營).

개설

후금·청과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도성의 길목인 한강 하류 수로와 유사시 왕의 피난처인 강화도 지역의 해양 방어를 위해 신설한 수영이었다. 충청·경기·황해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가 주둔한 수영(水營)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묘·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왕이 피신할 수 있는 보장처(保障處)로서 강화도의 군사적 가치가 중시되면서 신설되었다. 인조 즉위 이후 원래 남양(南陽)에 있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강화도로 이전하고, 정묘호란 직후에는 강화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1629년(인조 7)에는 교동(喬桐)을 도호부(都護府)로 격상시키고 강화에 있던 경기수영을 이곳에 이전하였다. 1633년(인조 11)에는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를 충청·경기·황해 3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어사로 승격시키게 되면서 교동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이 신설되었다.

조직 및 역할

삼도수군통어영의 수장인 삼도수군통어사를 약칭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라고 하였는데 종2품의 무관직이었다. 경기수군절도사와 교동도호부사를 겸직하였다. 도성으로 통하는 수로의 입구인 한강 하류와 강화도의 해안 방어를 담당하였다. 19세기 초반 통어영에는 중군(中軍) 1명, 수성파총(守成把摠) 1명, 초관(哨官) 4명, 기패관(旗牌官) 3명, 군관(軍官) 128명, 속오군(束伍軍) 4초(哨), 표하군(標下軍) 250명, 전선(戰船) 2척, 거북선 1척, 방선(防船) 1척, 병선(兵船) 4척, 사후선(伺候船) 8척, 급수선(汲水船) 3척, 선장(船將) 7명, 선봉장(先鋒將) 2명, 선감관(船監官) 1명, 군기감관(軍器監官) 4명, 지구관(知殼官) 4명, 기패관(旗牌官) 25명, 포도관(捕盜官) 15명, 교사(敎師) 1명, 별파진(別破陣) 4명, 사수(射手) 118명, 포수(砲手) 159명, 표하군(標下軍) 324명, 격군(格軍) 363명, 능로군(能櫓軍) 97명, 방수군(防水軍) 876명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779년(정조 3)에는 통어영을 강화로 옮겨 강화유수(江華留守)로 하여금 일대의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1788년(정조 12) 다시 교동으로 통어영을 이전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송양섭, 「17세기 江華島 방어체제의 확립과 鎭撫營 창설」,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李敏雄,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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