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관(校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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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적(經籍)의 인쇄, 향·축문(祝文) 및 관서의 인신(印信)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

개설

1392년(태조 1) 설치된 교서관은 교서감(校書監) 또는 운각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조선후기 정조대에 이르러 규장각의 부속기구로 개편되면서, 규장각은 내각(內閣), 교서관은 외각(外閣)이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교서관이 담당하던 업무는 ①경적·도서 등 서적의 인쇄·출판, ②목판·문적·도서의 장서·주자(鑄字)의 관리, ③도서의 반사(頒賜) 및 판매, ④향축(香祝)의 관장, ⑤인전(印篆)의 관장, ⑥기타 업무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서적의 인쇄·출판 업무는 교서관이 담당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서적’은 ‘유학의 여러 경적 및 제반 도서’를 의미하고, ‘인출(印出)’은 ‘편차(編次)·인쇄·장황(粧䌙) 즉 제본 등 출판의 제반 업무’를 의미한다. 교서관에서 책을 인출하려면 먼저 왕명이나 신하들의 진언이 있어야 했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면 교서관의 인출 작업이 시작되었다.

주로 활자와 목판을 사용해 인쇄했는데, 활자로 인쇄할 수 없는 지도류 등 특수 서적은 목판으로 인출하였으며, 고시문(告示文)이나 서류의 형식 및 표전(表箋)·책문(策文) 등의 서식 등은 활자로 인출·배포하였다. 그리고 과거(科擧)와 관련한 유학 서적 및 유생들에게 대량으로 필요한 서적은 인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활자보다 목판으로 인출하도록 하였다.

수요가 많은 주요 서적은 교서관에서 인출하고 그 인본(印本)을 지방 감영(監營)에 보내 다시 판각하게 하였다. 이렇게 판각된 판본은 교서관에 진상하도록 했는데,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각 지방에서도 서적 인출이 활발하게 되자, 교서관은 전국의 판본 소장 상황을 파악하는 업무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인쇄된 책들과 목판·장서·주자는 교서관에서 관리되었다. 이 중 목판 즉 판목은 교서관의 대청(大廳) 3칸을 비롯하여 서판당고(西板堂庫) 등 모두 29칸의 건물에 사서오경(四書五經), 제사자집(諸史字集) 판본을 소장·분장(分藏)하였다. 또한 1435년(세종 17) 9월에 주자소(鑄字所)가 경복궁 내로 이전하게 되자, 옛 주자소 건물은 목판고(木板庫)로 바뀌어 교서관이 관장하였고, 지방 관사 및 사찰 등에 보관되어 있는 판목의 관리도 교서관이 맡았다. 교서관의 장서 기능은 중요하여, 장기간 보존할 필요가 있는 서책은 반드시 교서관에 1건씩 분장하도록 하는 관례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서적의 인쇄·출판이 요구되었고, 출판된 도서의 유통 문제도 대두되었다. 교서관 서적의 유통은 반사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도서의 반사는 인출하는 서적의 부수와 성격에 따라서 받는 이의 관등에 제한을 두거나, 특정인을 지명하여 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적의 인출과 반사는 항상 왕명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반사의 거의 모든 경우에 반사기(頒賜記)를 작성하였다.

반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신하들과 유생들은 지적 욕구를 충당하기 위해 교서관 등에서 인출한 서적들을 종이[紙]·쌀[米]·콩[豆] 등으로 교환·구입하고자 하였고, 정부도 이에 호응하여 교서관에서 인출한 서적들을 판매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410년(태종 10) 2월 처음으로 주자소에서 인출한 서적을 판매하도록 허가하였고, 각 지방의 향교나 개인이 구입하고자 할 때는 ‘환지(換紙)의 교환’ 방법으로 판매·보급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교서관의 서적 판매는 세조·성종 때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이 같은 도서에 관한 제반 업무 외에 교서관에서는 향축과 인전의 관장 업무도 맡아보았다. 교서관은 왕실의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판(祝板)을 관장하는 한편, 각 아문의 인신이 완결(刓缺)되어 다시 개주(改鑄)할 때도 제반 업무를 맡아보았는데, 이런 이유로 전자(篆字)를 잘 쓰는 유생을 추천받아 교서관 관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 밖의 업무로, ‘활자의 주조’를 들 수 있다. 원래 교서관은 활자의 주조와는 관련이 없었던 기관으로, 16세기 이전에는 주자소·정음청(正音廳)·간경도감(刊經都監)·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이 관장하다가, 17세기 후기에 교서관에서 ‘교서관인서체자(校書館印書體字)’를 주조하면서 ‘활자 주조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확보하였다. 교서관인서체자는 두 차례 이상 주조되어 여러 관찬(官撰) 서적 및 문집류의 인쇄에 끊임없이 사용되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학부목활자(學部木活字)와 함께 교과서 인쇄에 사용되는 등 무려 200년 넘게 사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교서관에 주어진 제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서는 관리의 임명이 필수적이었다. 교서관의 관리 조직은 교서관의 역사와 함께 변천되었다. 교서관이 처음 세워진 태조 때(1392년) 교서관의 명칭은 교서감이었고 임명된 관리는 정3품의 판사(判事) 2명, 종3품의 감(監) 2명, 종4품의 소감(少監) 2명, 종5품의 승(丞) 1명, 정7품의 낭(郞) 2명, 정8품의 저작랑(著作郞) 2명, 정9품의 교감(校勘) 2명, 종9품의 정자(正字) 2명으로 총 15명의 문신이 업무를 담당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교서관이 고유의 명칭을 얻고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대에 들어서이다. 1401년(태종 1)에 태종은 국가의 제도를 개편하면서, 교서감과 서적원(書籍院)을 병합하였는데, 이때 교서감의 명칭을 교서관으로 변경하고, 소감 이상의 관원을 혁파하는 한편, 종5품 교리(校理) 1명, 종6품 부교리 1명을 두고, 참외(參外)는 전과 같이 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1401년에는 정2품의 제조(提調) 2명, 정3품의 판교 1명, 종5품의 별좌 1명, 종6품의 별제 1명을 교서관 직원으로 임명하였고, 그 후 ‘사준(司準)’에서 ‘공작(工作)’ 등에 이르기까지 교서관의 인출 등 고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관련 장인들을 무려 190명 이상 확보하여, 교서관의 고유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서책 인출의 공정을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의 조직 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러다가 세종에 이어 세조 때에는 교서관의 업무가 축소되었는데, 세조는 1461년(세조 7)에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불경을 비롯한 세조 시대의 거의 모든 서적을 인출하도록 하였다. 더군다나 1466년(세조 12)에 교서관은 전교서(典校署)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5품의 아문으로 강등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교서관이 다시 위치를 회복한 것은 성종에 의해서였다. 1471년(성종 2) 12월에 성종은 간경도감을 혁파함과 동시에 전교서에 합속(合屬)시켰다. 1484년(성종 15) 1월 21일에 성종은 전교서를 교서관으로 다시 고치고, 관제를 3품의 아문으로 승격·조정하였다(『성종실록』 15년 1월 21일). 이로써 교서관은 개국 초의 조직 면모를 회복하게 되었다. 또한, 1485년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최종 반포되면서 교서관은 명실상부한 3품의 관아로 제도화되었다. 한편 교서관의 잡직(雜織)이 『경국대전』에 제도화되면서 서적의 인출을 비롯한 여러 업무와 기능이 원활하게 수행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 후 교서관은 1777년(정조 1)까지 조직적 측면에서 큰 변화와 굴곡 없이 3품의 아문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777년에 규장각 제학서명응(徐命膺)의 건의에 의하여 규장각에 편입되었는데, 규장각을 내각이라 하고, 교서관을 외각이라 하였으며, 외각의 수장인 제조에는 내각 제학이, 부제조에는 내각 직제학이, 교리에는 내각의 직각(直閣)이 겸임하여, 내각의 주도 아래 운영되었으며, 그 기능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교서관의 명칭 및 담당 관원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지만, 교서관의 고유 업무인 서적의 인쇄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다. 조선왕조 전 시대에 걸쳐 인쇄·출판된 모든 관찬 서적은 교서관의 인쇄 활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주자소·간경도감·훈련도감·내의원·관상감·실록청·사역원 등에서 주조된 활자라 하더라도, 모든 활자와 목판들이 교서관의 관리하에 있었으며, 교서관 잡직의 업무 분과 및 소요 인원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됨으로써, 모든 관찬 서적의 인출이 교서관 전문 장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서관의 인쇄 활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꾸준하게 지속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다가, 17세기 중기 이후 다시 회복되었다. 1668년(현종 9)에 수어청(守禦廳)에서 주조하여, 1672년에 교서관으로 옮겨진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 즉 무신자(戊申字)의 등장은 교서관의 인쇄 활동을 부활시켰다. 연이어 교서관에서 직접 동활자(銅活字)로 주조한 1684년, 1723년의 교서관인서체자를 비롯하여, 1772년 임진자 즉 오주갑인자·1796년, 1858년의 정리자 등을 이용한 교서관의 인쇄 활동은 대한제국기까지 이어졌다.

교서관에서 이루어진 인쇄 활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첫째, 중요한 관찬 서적들은 반드시 왕명에 의하여 처음에 활자로 인쇄하였다가 다시 판각하거나, 그 인본을 지방 감영에 보내 각판하도록 했다. 둘째, 금속활자의 주조와 인출 못지않게, 대량의 목판 인쇄 활동 또한 매우 활발하였는데, 경서 및 농법서(農法書)처럼 대규모로 널리 배포할 필요가 있는 서적들은 아예 처음부터 목판본으로 대량 인출하도록 했다는 특징을 보인다.

셋째,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꾸준하게 주조된 금속활자가 교서관의 인쇄 및 출판 활동에 동원되었다는 특징을 들 수 있다. 즉 조선 초기에 주조된 ①1403년(태종 3)의 계미자, ②1420년(세종 2)의 경자자, ③1434년(세종 16)의 갑인자, ④1447년(세종 29)의 월인석보한글자, ⑤1436년(세종 18)의 병진자, ⑥1438년(세종 20)의 무오자, ⑦1450년(문종 즉위)의 경오자, ⑧1455년(세조 1)의 을해자, ⑨1461년(세조 3)의 을해자병용한글자, ⑩1457년(세조 3)의 정축자, ⑪1458년(세조 4)의 무인자, ⑫1465년(세조 11)의 을유자, ⑬1484년(성종 15)의 갑진자, ⑭1493년(성종 24)의 계축자 등 14종의 활자가 교서관에서 만들어졌다.

중기에는 ①1516년(중종 11)의 병자자, ②16세기의 인력자, ③1580년(선조 13)의 경진자, ④1587년(선조 20)경의 을해자체 경서자, ⑤1618년(광해 10)의 무오자, ⑥-⑦1668년(현종 9)의 무신자 및 무신자병용한글자, ⑧1676년(숙종 3)의 병진왜언자, ⑨1673년(현종 14)경의 낙동계자, ⑩1677년(숙종 3)의 현종실록자, ⑪1677년(숙종 3)경의 초주한구자, ⑫숙종 초기인 1684년 이전의 전기 교서관인서체자, ⑬-⑭1693년(숙종 19)의 원종자 및 원종한글자, ⑮1693년(숙종 19)의 숙종자, ⑯-⑰경종 초기인 1723년 이전의 후기 교서관인서체자 및 병용한글자 등 17종의 활자가 주조되었다.

후기에 주조된 ①1749년(영조 25)의 율곡전서자, ②-③1772년(영조 48)의 임진자 및 병용한글자, ④-⑤1777년(정조 1)의 정유자 및 병용한글자, ⑥1782년(정조 6)의 재주한구자, ⑦-⑧1795년(정조 19)의 초주 정리자 및 병용한글자, ⑨1800년 이전의 정리자체철활자, ⑩-⑪1816년(순조 16)의 전사자 및 병용한글자, ⑫1800년 초기의 필서체철활자, ⑬-⑭1858년(철종 9)의 재주 정리자 및 병용한글자, ⑮1858년(철종 9)의 삼주한글자, ⑯1883년(고종 20년)경의 신연활자 등 16종의 활자가 교서관의 인쇄 및 출판 활동에 동원되었다.

넷째, 교서관의 인쇄본은 매우 정교하였다는 특징을 들 수 있다. 교서관의 인쇄 작업은 오자·탈자가 없는 본문을 찍어내기 위하여 매 판마다 감인관(監印官)이 교감을 철저히 하였고, 관판본에 따라서는 감교(監校)와 감인(監印)의 관등성명을 권말에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작업 의식은 교서관이 규장각의 외각으로 편입되어서도 이어졌는데, 교서관의 제조·부제조·교리의 직임을 내각의 제학·직제학·직각에게 각각 겸임시켜 감교와 감인의 기능을 한층 더 강화하였던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의의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내세운 유교주의·숭문주의를 통해 학문적 발달이 왕성하였으며, 서적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전반적인 풍습으로 인해 서적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조선 정부는 서적을 명나라로부터 구입하거나 얻어오는 한편, 인쇄 기관의 설치를 통한 서적 편찬 활동을 통해 내부 수요를 충당하였는데, 교서관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설치된 기관이었다.

교서관은 시대에 따라 명칭이 바뀌거나 조직이 개편되는 등 역사적 부침이 계속되었으나 대한제국기까지 존속된 기관 중 하나이다. 그만큼 중요성을 대변할 수 있는데, 출판된 서적들의 정교성을 놓고 볼 때도 조선 정부의 숭문주의가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교서관에서 출판된 서적들이 일반인들을 위한 상업적 유통에 있어서는 활발하지 못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중앙 출판 기관으로서 정부의 수요를 담당했고, 반사나 한시적 판매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전해져 지방이나 개인 간판본들에 영향을 주는 등 조선시대 출판 활동의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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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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