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장(冶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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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를 생산하고 생산된 쇠를 주조하거나 벼리고 단련하여 각종 무기, 농기구, 연장 그릇 등을 만드는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는 야철장(冶鐵匠), 철야장(鐵冶匠), 노야장(爐冶匠), 철장(鐵匠), 철공(鐵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모든 장인의 대장’이라는 뜻의 대장장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야장(冶匠)은 좁은 의미로는 쇠를 가지고 각종 무기나 도구를 만드는 장인으로 무쇠를 생산하거나 무쇠로 된 솥이나 도구 등을 만드는 수철장(水鐵匠)이나 주물을 하는 주철장(鑄鐵匠), 놋쇠로 기물을 만드는 유철장(鍮鐵匠)과는 구분할 수 있으나, 이런 장인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도 쓰였다. 경공장(京工匠)으로는 사기장(沙器匠)을 제외하고, 외공장(外工匠)의 경우에는 지장(紙匠)을 제외하고 배속된 야장의 수가 가장 많았다.

담당 직무

야장은 쇠와 관련된 다양한 직무에 종사하였다. 첫째로는 조선초기에 야장은 공납할 정철(精鐵)을 만들어야 했는데, 정철을 만드는 기간이 1개월 정도 걸리며 그 기간 동안의 양식은 야장이 준비하여야만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월 28일). 야장은 지방관에 따라 과도하게 공납철(貢納鐵)을 납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6년 윤4월 20일).

둘째로 야장은 조선초기부터 국방 강화를 위하여 장기간에 걸쳐 무기 제작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매월 일정량의 무기를 감영 또는 병영 등에서 생산하였는데, 장기간의 근무로 인하여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1415년(태종 15)에 야장은 3월부터 7월까지는 농사를 할 수 있었으며 그 나머지 기간에 무기를 제작하였다(『태종실록』 15년 4월 20일). 조선초기에 지방의 야장은 전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이들은 국역에 응하지 않는 날을 제외하고는 세금을 납부하였는데, 주된 직능에 따라 그 액수가 달랐다. 유철장의 경우에는 봄에 정포(正布) 1필, 가을에 쌀 10말이며, 주철장의 경우에는 봄에 면포 1필, 가을에 쌀 15말, 수철장은 큰 가마의 경우 면포 1필 반, 가을에는 쌀 6섬 8말을 납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수량이 몇 년 동안에 80필에 달할 정도로 납부하는 액수가 많았다(『명종실록』 12년 5월 7일). 이들은 역에 응하지 않는 기간에는 각종 도구를 만들어 생활하였는데, 중앙 정부에서 지방의 무기를 점검할 때 자신이 생산한 칼을 팔아서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0년 11월 25일). 또한 지방 야장들은 군기시(軍器寺)에 불려가 무기를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대한 임금을 받았다. 야장은 칼, 화살촉 이외에도 선조 이후부터는 조총도 만들었다(『선조실록』 26년 12월 2일).

셋째로 야장은 철제 생활용품을 만들었는데, 원래 수철장이 만드는 농기구도 만들었다. 당시 이들은 천한 신분으로 인식되었는데, 선조 때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의 아버지가 야장이라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6년 3월 11일). 야장은 국가에서 공인하는 도량형을 표시하는 관인(官印)도 제작하였다. 조선후기 때 관청에 소속된 야장은 근무 기간 동안에는 급료를 받았으며, 관청에 소속되지 않은 야장이 국역(國役)에 동원될 때에 그에 상응하는 노임을 받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지급하는 노임이 적기 때문에 야장은 이 역에서 빠지기 위해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넷째로 야장은 무과 시험에 활의 적중 여부를 판단하는 일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수험생과 결탁하여 부정한 일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변천

고대사회부터 있었던 야장은 중앙 및 지방 부서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경공장으로서의 야장에 대한 기록은 태종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선공감(繕工監) 소속 야장이 숭례문의 행랑 등을 수리하기 위해 다른 장인과 함께 동원되었다고 한다(『태종실록』 15년 7월 17일). 세종 때 군기감(軍器監) 소속의 장인을 증원하였는데, 이때 야장은 10명을 늘려 총 25명이 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이어 단종 때에는 야장이 석공(石工), 목공(木工)과 동일하게 근무하도록 하였으며 목공과 마찬가지로 체아직을 받게 되었다(『단종실록』 3년 3월 10일). 세조 때에는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주장(鑄匠), 도자장(刀子匠)을 포함하여 야장의 정원을 90명으로 하였으며 한 번에 30명씩 근무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들의 체아직으로는 부전사(副典事) 1명, 급사(給事) 1명, 부급사(副給事) 2명 등 총 4명으로 하였다. 이때 군기감 소속의 야장은 정원이 45명이 되었으며 한 번에 15명씩 근무하도록 하였다. 또한 환도장 등 다른 장인들과 합하여 부전사 1명, 급사 2명, 부급사 2명 등 5명이 체아직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공조(工曹) 소속의 야장 정원이 50명이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 야장은 군기시 130명, 공조 4명, 상의원 8명, 교서관(校書館) 6명, 선공감 40명, 내수사(內需司) 2명, 귀후서(歸厚署) 2명이 정원이었다. 또한 지방에는 경상도에 121명을 포함하여 전국에 총 493명의 야장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도 경공장으로 야장은 존속하였으나 그 수는 대폭 줄었다. 인조 때 상의원에 소속된 야장 4명이 예장도감(禮葬都監)에 끌려갔는데 이로 인하여 중국 사신에게 줄 물품을 제작할 장인이 없는 지경이었다. 또한 교서관에는 원래 야장 6명이 있어야 하나, 실제로는 한 명도 없어서 인쇄할 때 사장(私匠)을 부렸다. 훈련도감의 경우에는 야장 10명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수가 부족하여 양인 출신의 젊은이를 야장으로 육성하여 훈련도감에만 근무하도록 하였다.

인조 때 서울의 야장 수가 많지 않아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 통영의 장인을 불러와야만 하였다. 수어청(守禦廳)의 경우에도 군기(軍器)를 제작하기 위해 불렀던 야장 가운데 7명에게 급료를 주었으며 이들은 영구히 수어청에 소속시켜 장인을 확보하였다. 관청에 소속되지 않은 야장 가운데 일부는 침탈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관장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야장은 한량인이 잡철전(雜鐵廛) 허가를 받고 지방의 중방철(中方鐵)을 독점하자 소송을 하는 등 싸웠다. 결국 정조 때 야장이 중방철의 판매를 맡게 되었다. 그 뒤 잡철전 시인(矢人)과 서울의 야장은 8년 이상 계속 다투었으며 끝내는 야장이 중방철을 판매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들은 그 대가로 정부에 정철을 납품하였는데, 정부의 구매가가 시장 가격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아 순조 때에는 이에 대한 가격 조정이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유승주, 『조선시대 광업사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3.
  • 홍정실, 『수공정신과 공예기술』, 길금공예연구소, 2006.
  • 홍정실, 『거멍쇠의 자존심』, 길금공예연구소, 2008.
  • 강만길, 「조선후기 수공업자와 상인과의 관계」, 『아세아연구』 9-3호, 고려대학교, 1966.
  • 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사장」,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이혜옥,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 『역사와 현실』 33, 1999.
  • 주경미, 「한국 대장장이의 역사와 현대적 의미」, 『역사와 경계』 2011년 여름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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