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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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을 모셔두는 빈전(殯殿)에서 승하하신 분의 영전(靈前)에 시책(諡冊)시보(諡寶)를 올리는 의례.

개설

죽어서 받는 이름이 시호(諡號)이다. 왕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와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를 받기 때문에 이를 위한 각각의 의례가 있었다. 시호는 왕의 일생에 대한 평가의 의미를 갖는다. 왕이 죽으면 먼저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지었고 이를 토대로 시호를 결정하였다.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의 경우 2품 이상의 재상들이 모여 의논한 것을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에게 보고한 후 허락을 받아 결정하였다. 시호가 정해지면 이에 관한 책문(冊文)을 써 넣은 시책과, 시호를 새긴 도장인 시보를 만들어 종묘에 고하는 청시종묘의(請諡宗廟儀)를 행한 뒤, 빈전에서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를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상시책보의의 의례 절차는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다만 의례를 주관하는 집사자의 명칭이 제도의 변화에 따라 조금 변하였다. 또 영조 때에 이르러 조선초기에는 5, 6첩에 불과하던 옥책(玉冊)이 10여 첩에 이르는 것도 많아 보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내용상 줄을 바꿔 써야 할 곳은 칸을 띄는 것으로 대신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아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수록하도록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의식은 시책과 시보를 받들고 들어가 읽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 된다. 의례를 거행하기 1일 전에 충호위(忠扈衛)에서 영의정(領議政)의 임시 거처인 막차(幕次)와 시책과 시보를 보관할 책보악(冊寶幄)을 설치하고, 의례 당일 전의(典儀)가 시책과 시보를 놓는 자리를 표시하는 욕위(褥位), 시책과 시보를 읽는 독책관(讀冊官)과 독보관(讀寶官), 이를 받들고 가는 봉책관(奉冊官)과 봉보관(奉寶官) 및 시책과 시보를 놓아둘 책상을 들고 가는 거책보안자(擧冊寶案者)의 자리를 빈전의 동쪽 계단 아래에 있는 영의정의 자리 뒤에 설치한다. 의례를 진행하는 전의(典儀), 대치사관(代致詞官), 통찬(通贊), 봉례랑(奉禮郞)의 자리는 빈전의 동쪽 계단 아래에 설치하고, 의례에 참석하는 종친과 문무백관 및 감찰(監察)의 자리는 빈전의 바깥 뜰에 설치한다. 의례를 거행하기 약 30분 전인 2각 전에 유사(有司)가 준비한 음식인 예찬(禮饌)을 올리면 내시(內侍)가 영좌 앞에 진설하고, 향로(香爐), 향합(香盒), 초를 그 앞에, 술동이를 지게문 밖 왼쪽에 설치하고 술잔을 3개 놓아둔다.

의례 시작 1각 전에 집사관이 먼저 자리로 나아가고,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도 자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의례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 자리에 선다. 의식은 사배(四拜), 삼상향(三上香), 작헌(酌獻), 치사(致詞), 독책, 독보, 사배의 순으로 진행한다.

사배는 4번 절하는 것이다. 영의정 이하 관원은 자리에 나와 전의의 말에 따라 4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삼상향은 향을 3번 올리는 것이다. 영의정이 향을 놓아둔 책상 앞에 북쪽으로 꿇어 앉아 3번 향을 올리고 술잔도 이어서 3번 올린다. 영의정은 물러나 뜰 가운데에 북쪽으로 선다. 치사는 대치사관이 영좌 앞에 나가 꿇어 앉아 영의정을 대신하여 ‘영의정 신 아무개는 교지(敎旨)를 받들어 시책과 시보를 올립니다.’라고 읽는 것이다. 대치사관은 치사를 마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자리로 돌아간다. 모든 관원은 엎드렸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독책과 독보는 봉책관, 봉보관, 거책보안자가 정해진 자리에 책상을 설치하고 책보를 올려놓으면 독책관과 독보관이 읽는 것이다. 시책과 시보를 책상 위에 놓으면 영의정, 독책관, 독보관이 영좌 앞에 북쪽으로 선다. 영의정이 영좌 앞에 꿇어앉으면 독책관이 책문을 읽고, 독보관이 보문을 읽는다. 자리로 돌아와 4번 절하고 몸을 바로 하고 나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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