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대장(殿庭大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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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에서 시행되는 공식 행사에 사용되는 가장 큰 규모의 의장 구성.

개설

조선은 유교적 의례의 실천을 통해 왕 중심의 질서 체제를 강화하고 확산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마당에 배치되는 의장(儀仗)은 의례 공간을 상징하고, 왕의 신분적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정교하게 설정되었다. 행사의 성격에 따라 의장은 세 등급으로 규정되었는데, 대장(大仗)은 최상위 등급의 의장 편성으로 정월 초하루와 동지(冬至), 왕 탄신일에 시행되는 조하(朝賀) 때 사용하였다.

왕이 외부 출입할 때 동원되는 행렬 구성을 노부(鹵簿)라 하고, 노부는 규모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로 구분된다. 궁궐 마당에 배치되는 의장도 이에 대응하여 대장(大仗)·반장(半仗)·소장(小仗)의 등급 구분이 있고, 각 등급별로 노부와 동일한 의장물 구성을 가졌다. 따라서 전정대장은 대가노부와 동일한 의장물로 구성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에서 의장기와 다양한 기물을 통해 왕을 상징하는 의장 구성법은 건국 초기부터 이루어졌다. 국상(國喪)에는 흉의장(凶儀仗)과 함께 길의장(吉儀仗)이 동원되는데, 이때 길의장의 구성은 대가노부와 동일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조선에서 전정대장의 의장물 구성은 대가노부에 상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종 국상의 길의장이 확인되는데, 축소된 규모라고 하지만, 동원된 의장물은 태종 장례와 거의 동일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태종의 의장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세종은 대가의장(大駕儀仗)을 사용하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에(『세종실록』 4년 6월 16일), 태종의 국상에 동원된 길의장이 대가 편성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태종의 의장이 태조에 준하여 구성된 것인데, 태종의 길의장에 동원된 의장물은 『세종실록』「오례」 대가노부와 거의 유사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때의 규정이 성종 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대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의장물의 종류와 규모는 건국 초기부터 대체로 변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궁궐에서 행사가 진행될 때 배치되는 의장은 세종 초까지는 왕의 어좌가 마련되는 정전(正殿)의 상하 월대(月臺)에 집중 배치되었다. 이런 방식은 고려 이래의 방식이었다. 1428년(세종 10) 무렵에는 의장 배치가 마당의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 확대되었다. 『세종실록』「오례」에는 동쪽과 서쪽에 삼행(三行)으로 의장을 집중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였지만, 『국조오례의』에는 동쪽, 서쪽, 남쪽에 의장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환원되었다. 이러한 의장 배치 방식은 향후 변함없이 준수되었다.

의장이 행사장 마당까지 확대되어 배치되면서 노부에 동원되는 의장을 그대로 궁궐 행사에 적용하는 원칙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27년(세종 9)에 마당으로 의장 배치가 확장된 의식이 나타나고, 1431년경(세종 13)에는 대가의장이 그대로 전정의 의장으로 동원된 사실이 확인된다. 노부를 구성하는 의장물이 궁궐 행사에 동원되면서, 행사의 성격에 따라 의장의 규모를 조정해야 했다. 노부는 대가와 소가로 편성되었다가, 『세종실록』「오례」에서 법가의 구분이 추가됐다. 이에 짝하여 전정의 의장도 대장을 대가노부에, 반장을 법가노부에 준하여 편성하였다. 세조대를 거치면서 소가노부에 준하는 소장 개념이 확립되었고, 이러한 등급 구분이 그대로 『국조오례의』에 수록되게 되었다.

전정대장의 경우는 1428년(세종 10) 무렵에는 궁궐 행사에 대가의장이 동원되면서 확립되었고, 『국조오례의』 단계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왕을 항상 수행하는 일부 의장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들 의장은 등급에 상관없이 고정된 패턴을 갖게 되었다. 왕의 가마인 여연(輿輦)과 말은 국초 이래로 의장 체계와는 분리되어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 후반 의장 제도가 전면 재정비되면서, 황제부터 제후에 이르기까지 신분상의 차등에 따라 수레의 종류와 규모를 다르게 하는 중국 고전의 전통을 차용하게 되었다. 『세종실록』「오례」의 전정대장은 왕을 수행하여 이동하는 수행 의장과 이와 별도로 병조(兵曹)에 의해서 배치되는 전정의장, 사복시(司僕寺)에 의해 진열되는 여연과 어마(御馬), 의장용 장마(仗馬) 등으로 구성되었다. 수행 의장은 의장 등급에 관계없이 동일한 편성을 갖지만, 마당에 배치되는 의장과 여연 등은 의장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었고, 이러한 편성은 『국조오례의』에 승계되었다.

세조대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신호 체계를 정비하면서 형명(形名)이 재정비된다. 이때 정비된 형명은 둑기(纛旗)와 교룡기(交龍旗), 표기(標旗) 등으로 구성되고 북과 징을 사용하였는데, 왕에게 의정을 아뢰는 상참(常參)에서 의장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형명은 군을 지휘하는 실질적 기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상징성만 있는 의장 체계와는 구분되어 파악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둑기와 교룡기 등이 의장 체계 내에 수용되어 약간의 변화가 수반되었다. 정조 초까지의 의례 관행을 정리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변화된 의장 제도가 수록되어 있다.

절차 및 내용

전정의장의 구성과 그 배치 방식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확립되었다. 최종적으로 조선에서는 이동용 의장 구성인 노부와 궁궐 내에서의 의장을 동일한 편성으로 구성하였다. 노부의 구성은 여연과 어마 등의 탑승 장비와 이에 수반하는 다양한 의장물, 시위 병력으로 이루어졌다.

궁궐 마당에서는 다양한 상징물 중심으로 의장이 인식되었고, 탑승 장비는 이와 분리하여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의장 배치 과정에도 반영되어 『세종실록』「오례」에서는 사복시의 주도로 먼저 여연과 어마, 장마 등을 마당 가운데 길과 동쪽과 서쪽에 진열하였다. 이어서 의례의 시간을 알리는 초엄(初嚴) 무렵에 의장을 마당의 동쪽과 서쪽에 삼행으로 배열하였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서는 탑승 장비와 의장을 통합하여 인식하였고, 의례 공간을 구획하는 의장의 기능을 강조하게 되었다. 『국조오례의』에서는 초엄 신호가 울리면 바로 병조에서 주관하여 의장을 정전의 월대와 마당의 동쪽과 서쪽, 남쪽 지점에 의장을 배치하도록 하였다. 왕권을 상징하는 기능을 유지하면서, 의장물로 행사장의 동서와 남쪽을 둘러싸서 의례 공간을 표시하도록 설정한 것이었다. 동서의 의장은 각각 홍문대기(紅門大旗)로 시작을, 후전대기(後殿大旗)로 종료 지점을 표시하였다.

의장의 배치와 함께 사복시가 여연과 어마, 장마 등을 배치하여, 이들을 예장(禮仗)의 일부로서 포함시켰다. 궁궐 행사는 왕이 외부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들 장비는 실제의 탑승이 목적이 아니라 왕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연과 어마는 등급에 따라 동원되는 종류와 수량이 조정되었다.

왕이 입장하면서 왕을 직접 수행하는 산(繖)과 선(扇)으로 편성된 수행 의장이 어좌의 앞뒤에 위치하였다. 이로써 의장의 배치가 종료되는데, 왕의 수행 의장은 의장의 등급에 관계없이 동일한 편성을 갖추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통전(通典)』
  • 『문헌통고(文獻通考)』
  • 『대명집례(大明集禮)』
  • 『제사직장(諸司職掌)』
  •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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