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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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社稷壇)에서 기고(祈告)의 제사를 거행하는 의식.

개설

사직(社稷)에서는 춘추대제(春秋大祭)나 납일제(臘日祭)와 같은 정기 제사들 외에 국가의 중대사를 사직신(社稷神)에게 고하는 고유제(告由祭)와 가뭄이 들었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왔을 때 지내는 기우제(祈雨祭)·기청제(祈晴祭) 등의 부정기적인 제사들이 시행되었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서는 이들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와는 별개로 ‘기고(祈告)’라는 항목으로 분류했으며, 제사 의식은 소사의 규정을 적용하였다.

기고는 문자 그대로 소원을 비는 ‘기(祈)’와 사실을 고하는 ‘고(告)’로 나누어진다. 먼저, ‘기’는 홍수 등의 수재(水災)와 가뭄 등의 한재(旱災), 메뚜기 떼 등의 자연재해로 농사에 큰 피해가 있거나 전염병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때,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재해와 전염병의 소멸, 전쟁의 승리 등을 기원하기 위해 사직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을 일컫는다. ‘고’는 책봉(冊封)이나 관례(冠禮)·혼례(婚禮) 등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 사직 건물을 수리하면서 사직신의 위판을 옮겨야 할 일이 있을 때에 그 내용을 사직신에게 알리는 제사이다.

특히 ‘기’에서 기도하는 사유가 아주 급박한 일인 경우에는 제사의 길일(吉日)을 택일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즉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 기도에 대한 응험(應驗)이 있는 경우에는 그에 대한 보답의 제사를 시행했는데, 이를 보사(報祀)라고 한다. 수재나 한재 등의 재해 때문에 제사를 올린 경우에는 입추(立秋)가 지난 후에 보사를 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세종실록』「오례」에서는 사맹월(四孟月), 즉 봄·여름·가을·겨울이 시작되는 첫 달인 음력 1월·4월·7월·10월에 좋은 날을 점쳐서 택하여 사직에서 제사하며 기고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기고 사직의).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에서는 일정한 날이 없이 일이 있을 때마다 기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편, 정조대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기고를 국왕이 직접 주관하는 ‘친제기고사직의(親祭祈告社稷儀)’가 새로 제정되어 대사의 규정이 적용되었으며, 또 지방의 주현(州縣)에서 거행하는 기고 의식으로 ‘주현기고사직의(州縣祈告社稷儀)’도 제정되었다.

절차 및 내용

기고는, 정조대에 제정된 ‘친제기고사직의’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소사의 규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춘추대제 및 납일제 등 대사와는 다른 점들이 있었다.

먼저 재계(齋戒) 기간이 대사보다 축소되어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만 실시하였다. 산재 기간 중에 제관(祭官)은 평소와 똑같이 일상 업무를 수행하되, 술을 마시지 않고 파·부추·마늘 등을 먹지 않으며 조상(弔喪)이나 문병(問病)을 하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보고받거나 서명하지 않으며 기타 더럽거나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않도록 하였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이 기간 중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 제관들은 산재 2일 동안은 정침(正寢)에서, 치재 1일은 제사 장소에서 자도록 하였다. 그리고 만약 급박하게 기고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3일의 재계를 생략한 채 청재(淸齋) 1일만 하고 제사를 시행하였다.

제사 1일 전에 기고에서 사용할 향(香)과 축(祝)을 전달하는 전향축(傳香祝) 의식을 거행하였다. 또 사직단 안팎을 청소하고 사직신의 신좌(神座)와 제관들의 자리를 설치하며,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점검하였다. 제사 당일에는 축판(祝版)·폐백(幣帛)·제기(祭器)·제수(祭需) 등을 사직단에 배치하였고, 이어 사직신의 위판(位版)을 신좌에 설치하였다.

기고의 제사 절차는 희생의 털과 피를 묻는 의식인 예모혈(瘞毛血)→신을 맞이하는 의식인 영신(迎神)→신에게 폐백을 드리는 의식인 전폐(奠幣)→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작헌(酌獻)→제사에 쓴 제기를 거두는 의식인 철변두(徹籩豆)→신을 보내는 의식인 송신(送神)→축판과 폐백을 예감에 묻는 의식인 망예(望瘞)의 순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춘추대제나 납일제와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작헌에서 술을 한 번만 올리는 것이 춘추대제 및 납일제와 달랐으며, 그에 따라 헌관(獻官)도 2품 관원 1명만 배정되었다. 또 음복례(飮福禮)가 없는 것도 춘추대제 및 납일제와 다른 점이었다. 단, 기고에 응험이 있어 보사를 시행하는 경우에는 음복례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희생도 소사의 규정에 따라 돼지 한 마리를 사용했다가, 사직신은 넷인데 희생으로 돼지 1마리만 쓰는 것은 구차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1774년(영조 50)에 돼지 2마리를 쓰는 것으로 규정이 바뀌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 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박례경, 「조선시대 국가 전례에서 社稷祭 의례의 분류별 변화와 儀註의 특징」, 『규장각』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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