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노부(大駕鹵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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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갖추는 가장 큰 규모의 행렬 구성, 또는 그 의장 제도.

개설

왕이 의장과 의물을 갖추고 궁궐 밖으로 이동하는 것을 예행(禮行)이라 한다. 노부(鹵簿)는 예행에서 갖추어야 하는 의장과 의물을 법적으로 규정한 것인데, 조선에서는 예행의 종류에 따라 대가(大駕)·법가(法駕)·소가(小駕)의 등급을 정하였다.

노부는 왕이 탑승하는 가마인 연(輦)을 중심으로 경호용으로 배치하는 부연(副輦)과 부여(副輿), 어마(御馬)장마(仗馬)를 포함하여 각종의 상징용 의장과 시위 병력으로 구성되었는데, 대가노부는 가장 규모가 큰 행차 구성이었다. 조선에서 대가노부를 사용하는 경우는 왕이 직접 종묘와 사직에 제사하기 위해 나갈 때와 중국의 조서와 칙서를 맞이하는 때로 한정되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노부는 본래 방패를 기록한 장부를 뜻하는 말로 특별한 신분의 사람을 방패를 세워 보호한 데서 시작하여 점차 의장이라는 개념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노부는 외부에서 이동할 때 갖추게 되는 예장(禮仗)의 의미도 갖고 있다. 중국의 고전에서 황제와 제후는 이동할 때, 수레를 이용하는데 이때 동원된 수레에는 기치(旗幟)를 세워 신분을 상징하도록 하였다.

중국의 『통전(通典)』과 『문헌통고(文獻通考)』는 조선에서 예제(禮制)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로 참고한 자료인데, 각각 당과 송의 노부 제도를 수록하고 있다. 고려의 경우도 이들 자료에 나타난 제도를 수용하여 노부를 편성하였다. 조선에서는 중국 황제의 형제, 또는 자식의 위치인 친왕(親王)으로서 조선 왕의 위치를 설정했기 때문에 당이나 송, 혹은 고려의 노부 제도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개별적인 의장물은 이들 제도에서 채택하였지만, 적절히 가감하여 조선 고유의 노부 편성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의 대가노부는 가장 큰 규모의 행차용 차림이지만, 동원되는 의장이 150여 개 정도로 500여 개가 넘었던 고려의 법가노부에 비하면 매우 축소된 것이었다. 조선의 대가노부는 태조 때부터 대체로 동원되는 의장물의 종류와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와는 별도로 일상의 의장으로 사용되는 소가노부가 운용되었다. 『세종실록』「오례」에는 대가와 소가의 중간에 법가가 규정되어 있는데, 법가는 1430년(세종 20)대 후반에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1474년(성종 5)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세종실록』「오례」에 정비된 노부의 내용이 의장물과 규모에서 큰 변화 없이 계승되었는데, 다만 시위 병력의 편성은 군제의 변화를 반영하여 수정되었다. 조선에서 노부는 사실상 의장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노부라는 표현은 대가·법가·소가로 등급 구분이 있는 왕에게만 사용하였고, 단일한 편성만을 사용한 왕비와 왕세자의 노부는 의장으로 지칭하였다.

대가노부를 구성하는 의장물의 종류와 규모는 국초 이래 거의 변화가 없다. 다만, 세조대 군대를 지휘하는 데 사용되는 체계인 형명(形名) 제도를 정비하면서, 왕이 사용하는 표기(標旗)와 둑기[纛旗], 교룡기 등을 규정하였는데, 훗날 이들 형명이 의장 제도에 통합되면서 노부 구성물에 약간의 의장물이 추가되었다. 조선후기 노부의 편성은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의 대가노부는 형명이 추가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의장물 구성과 규모에서 큰 변화 없이 국초 이래의 제도를 계승하였다.

절차 및 내용

노부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편성이기 때문에 구성에서 이동용 장비가 일차적 중요성을 갖는다. 중국 고전에서는 신분에 따라 동원되는 탈 것의 종류와 규모를 달리하였다. 천자(天子)는 일반 수레보다 규모가 큰 로(輅)를 타고 제후는 수레[車]를 타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원되는 수레에는 각종의 기치를 세워 표시하였는데, 후대 왕조에서는 다양한 의장물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하여 편성된 제도를 노부로 통칭하였다.

조선에서도 국초에는 왕의 이동에 상로(象輅)가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수레는 배제되고 왕의 승용 기구로 여(輿)와 연(輦)만 사용하였다. 연은 덮개와 가리개가 있는 가마로 대궐 밖에서 탑승하였고, 여는 덮개가 없는 기구로 궁궐 내 이동 시에 이용하였다. 대가노부에서는 왕의 승용 기구로 대연(大輦)에 부연과 소여(小輿)를 갖추었고, 어마와 장마 16필을 동원하였다. 이외에도 의자인 교의(交椅)가 포함되었다.

노부의 반열 구성은 수행하는 모든 인원을 포함하지만, 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한정하여 노부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행차 시 구성은 좌우와 중앙으로 의장물의 위치가 지정되는데, 좌우에는 각각 홍문대기(紅門大旗)로 시작하여 후전대기(後殿大旗)까지의 사이에 의장물이 배치되었다. 대가노부의 선두에는 주작·현무·청룡·백호 등 사방신에 황룡기(黃龍旗)를 더한 오방기(五方旗)가 자리 잡았다.

왕권을 상징하는 각종의 의장기와 함께 군사적 위용을 드러내는 다양한 병장기가 배치되었다. 이들 병장기는 상징 기능만 있는 것으로 나무 재질에 적절한 채색과 장식을 더한 것이다.

왕이 탑승한 어연의 앞에는 붉은 양산인 홍양산이 위치하였고, 바로 뒤에는 푸른빛의 큰 부채인 청선(靑扇)이 따르도록 하여 왕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홍양산 앞에는 수정장(水精杖)금월부(金鉞斧) 등이 있었는데, 각각 왕의 신비한 능력과 생사권을 상징하는 장치였다. 대가노부는 법가나 소가와 비교할 때, 주작기(朱雀旗)현무기(玄武旗)가 하나씩 추가되어 있는데, 주작기는 어가의 앞쪽에 위치하여 남쪽을 상징하고, 현무기는 뒤쪽에서 북쪽을 상징하는 기능을 하였다. 육정기(六丁旗)는 대가에만 편성되었는데, 군사적 위엄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의장물은 수량을 축소하여 법가와 소가에도 편성되었다.

시위 병력은 행렬에 횡으로 배치되었는데, 시대별로 군제의 변화에 따라 동원되는 병력의 종류와 편성이 수정되었다. 정조 때까지의 제도를 담은 『춘관통고』에서는 노부 배열을 도식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행렬 선두에는 선상군병(先廂軍兵)을 좌우 홍문대기 사이에 횡으로 배치하고, 후미에는 후전대기 사이에 후상군병(後廂軍兵)을 배치한 형태이다. 선상군병에 이어 둑기와 교룡기(交龍旗)가 중앙에 위치하고 이어서 각종의 의장물이 따르도록 설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통전(通典)』
  • 『문헌통고(文獻通考)』
  • 『대명집례(大明集禮)』
  • 『제사직장(諸司職掌)』
  •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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