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월부(金鉞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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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부(鹵簿) 행렬에 편성된, 금으로 도금한 의장용 도끼.

개설

노부 행렬에는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깃발·부채·덮개·병기·악기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의장 용품이 사용되었다. 금월부는 이러한 의물(儀物) 가운데 하나로, 나무로 만든 뒤 금으로 도금한 도끼이다.

연원 및 변천

절(節)과 월(鉞)은, 중국 송나라 때 황제가 임지로 떠나는 절도사(節度使)에게 절과 긴 자루가 달린 도끼 모양의 부월(斧鉞)을 하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절은 지휘의 권한을, 부월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상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신임 관찰사(觀察使)나 유수(留守), 병사(兵使) 등의 지방관이 부임할 때 왕이 손에 쥐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의 절과 함께 부월을 내려 주었다. 그뿐 아니라 부월과 절은 국가 행사의 의장에도 포함되어 왕의 통치권과 위엄을 상징하였다.

금월부는 조선시대 대가노부(大駕鹵簿)에 5개, 법가노부(法駕鹵簿)에 3개, 소가노부(小駕鹵簿)에 2개가 편성되었다. 대가노부의 경우, 왕의 가마 중 하나인 소연(小輦)의 뒤에 은월부(銀鉞斧) 4개, 금월부 4개가 서로 짝을 이루어 각각 좌우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금월부를 든 군사는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하였다. 나머지 1개의 금월부는 왕의 가마인 어연(御輦)의 바로 앞 오른쪽에 진열되었으며, 그 반대쪽에는 수정장(水精杖) 1개가 진열되었다. 이것을 앞의 것과 구분하여 소금월부(小金鉞斧)라고도 하였는데, 쇠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하여 만들었다. 수정장과 소금월부를 든 군사는 청의(靑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하였다. 왕비도 내·외명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므로, 중궁(中宮) 노부에 금월부 2개와 은월부 2개가 편성되었다. 이때 금월부를 든 군사는 청의에 피모자를 착용하였다.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의 의장에는 금월부나 은월부가 포함되지 않았다.

금월부는 노부 행렬뿐 아니라 각종 국가 의례에서도 의물로 자주 사용되었다. 궁궐 안에서 시행되는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 황태자천추절망궁행례의(皇太子千秋節望宮行禮儀), 배표의(拜表儀), 배전의(拜箋儀), 전향의(傳香儀) 등에도 사용되었다. 정지급성절망궐행례의의 경우, 왕이 배위(拜位)에 사배(四拜)하기 직전에 정계(正階) 아래쪽 좌우에 각종 산(繖)·선(扇)·화개(華蓋)·수정장(水晶杖)과 함께 진열되었다.

1747년(영조 23)에는 대왕대비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에 사용되었고(『영조실록』 23년 2월 19일), 1783년(정조 7)에 정조의 생모 혜경궁(惠慶宮)의 의장을 정할 때도 금월부 1개가 포함되었다(『정조실록』 7년 3월 27일). 또 1789년(정조 13) 10월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옮길 때의 노부 행렬에서는 금월부 2개가 신여(神轝) 앞에 진열되었다(『정조실록』 13년 10월 5일). 1802년(순조 2)에는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양지당(養志堂)에서 선원전(璿源殿)으로 환안(還安)하고, 정조의 어진을 주합루(宙合樓)에서 선원전으로 옮기는 의식을 행할 때에도 의장 행렬에 금월부를 편성하였다(『순조실록』 2년 8월 15일).

형태

나무를 도끼 모양으로 깎아 금으로 도금한 뒤, 붉은색으로 칠한 자루에 꿰어서 만든다. 도끼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외날이다. 도끼머리에는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드러낸 용이 새겨져 있고, 상단에는 작은 창날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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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의궤반차도와 거동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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